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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멘 Feb 15. 2022

직업병

개 같은 서른 하나 _일 

                         

 오랜만에 직장 근처에서 친한 언니랑 점심을 먹게 됐다. 맛있는 파스타 가게에 가자며 평소보다 30분이나 일찍 나왔는데 웨이팅이 30분이었다. 대기명단을 올려놓고 급히 다른 파스타 가게로 갔다. 다행히 우리 앞에 한 팀. 10분 뒤 들어가 주문할 수 있었다.    

 

 식전 빵을 먹으며 2,000원을 추가해 아메리카노를 먹을까 말까 고민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에 흠칫, 초록색 통화버튼을 밀고 습관적으로 녹음 버튼을 누른 뒤 전화를 받았다. 뭐야, 대기 차례가 됐다는 전화였다.      


 유별난 직업 탓에 녹음이 습관화됐다. 갓 취직한 햇병아리 시절 녹음의 필요성을 여실히 느꼈다. 내 취재 분야는 특수하다. 출입처는 언론사로, 언론인들을 취재한다. 다들 어찌나 똑똑한지 A를 물어보면 A를 물어본 이유까지 추론해 대답했다.      


 제대로 질문 못 하면 무시하지, 언제 자기가 그런 말 했냐고 발뺌하지, 소송이라도 가게 되는 날에는 녹취파일 없는 게 패소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목격한 뒤로 입사 1개월 만에 갤럭시로 갈아탔다.  

    

 또 다른 직업병은 늘어난 ‘말발’이다. 취재 대상은 주로 나보다 경력 높은 선배 언론인이었기에 어리바리하면 “똑바로 물어봐라” 수모를 겪었고, 빈틈이 보이면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했다. 어려 보이면 “몇 년 차냐” 물었고, 툭하면 “나도 기자 해봐서 아는데” 으름장 놓기 일쑤였다.    

  

 폭격기 같은 겁박에 얼어서 한 마디도 못한 날이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이를 갈았다. 그런 날들이 쌓였다. 낮은 연차부터 전쟁 같은 티키타카를 겪으며 나도 모르게 강해졌다.    

  

 얼마 전 언론사가 아닌 회사를 취재하게 됐다. 사측의 입장을 듣는데 자리에 앉을 때부터 본인은 아는 기자가 많다, 나중에 법적 절차를 밟을 수 있다, 피해자가 염려된다 등 허튼소리를 하기에 차분히 대답했다. 


 “제가 아는 기자가 더 많다”, “법적 절차 밟을 거면 같이 녹음하자”, “피해자가 공론화한 사건이다” 등. 지지 않고 반박하는 내 모습을 보며 진정한 쌈닭이 되었구나 싶어 대견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이런 변화를 싫어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자기주장만 세졌단다. 사랑하는 딸이 편하고 사랑받고 베푸는 직업을 갖길 바라는 마음,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걱정에서 나오는 잔소리가 상처로 다가올 때가 있다.      


 유독 생각대로 안 풀린 날, 여기저기서 얻어터지고 온 날이면 집에서까지 날이 서있다. 부모님의 조언을 웃어넘길 때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높을 때고, '나도 이렇게 살기 싫다'며 반박할 땐 자부심이 낮아졌을 때다.      

 아니, 안 좋은 거 투성인데 나 왜 계속 이 일을 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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