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서른 하나
서른한 살에 짊어진 결혼 부담은 버티기 버거운 수준의 공포였다. 아마 상대가 있다 없으니까 더 그랬겠지.
부모님은 은연중에 기회가 될 때마다 결혼이란 단어를 언급했다. 재료를 사다가 김밥을 만들면 “우리 딸이 드디어 시집갈 준비가 됐네”라고 말했다. 주말에 쉬고 있으면 “나가서 남자를 만나”라고 했으며, 침대에 누워있으면 “날씬해야 결혼할 수 있어”라고 툭툭 화살을 날렸다. 주변의 결혼 소식이 들리면 “우리 딸은 언제쯤 결혼할까”라는 이 모든 말들은 내가 소리를 질러야 끝이 났다.
교회나 결혼식에 가면 만나는 어른마다 언제쯤 결혼할 거냐 물었다. 상대가 없다고 말하면 있는 거 다 안다고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과하게 활짝 웃음 짓고 넘기는 것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 또는 관심이란 이름으로 둔갑한 무례한 참견을 일삼는데 안부 인사로 결혼 여부를 묻는 게 대표적이었다. 나의 결혼 여부가 당신의 삶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텐데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삼십 대 초반의 여성이 결혼 준비하지 않는다는 건 그 나이 때 당연하게 해야 할 것을 안 한다는 죄책감을 심어줬다. 마치 고3인데 공부를 안 한다거나, 이십 대 초반에 대학을 안 다닌다거나, 대학교 4학년 때 토익 점수가 없는 식의 죄책감. 정해진 나이 때 해야 할 일을 못 했다는 생각이 결국 나를 괴롭혔는데, 올해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내가 그렇게 못난 사람인가’였다.
결혼을 독촉하는 이들의 논리는 한결같았다. 남들처럼 가정을 꾸려 보통의 삶에 편입하라는 주문. 하루 이틀 스트레스가 쌓이니 ‘진짜 나 아무나 만나서 결혼한다?’ 등의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정말 이대로 주변 압박에 미쳐버리면 없던 비혼에 대한 고민까지 진지하게 해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편하게 결정하고 싶다. 평생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에 우리 앞을 가로막는 것이라곤 다 깨부술 요량으로 사랑부터 하고 싶다. 그러다 헤어지기 싫은 날이 쌓이고 쌓이면 슬그머니 헤어지지 않은 날들을 늘리다가, 서로의 삶에 적당히 스며들었다 싶으면 결혼을 결정하고 싶다. 오롯이 혼자서 아니면 둘이서 결정하고 싶으니, 주변에 관심들은 이만 꺼(져) 주셨으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나타나면 결혼하고, 그런 마음이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된다.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결혼할 상대가 중요한 것이다.
간혹 어떤 사람들에게 결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대로 나 혼자 늙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노후엔 결혼 여부, 자식 유무를 막론하고
모두가 공평하게 불안하고 외롭고 서럽고 혼자 죽어간다.
가족으로 보장받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임경선 『자유로울 것』(위즈덤하우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