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3, 28, 31, 44
자동으로 뽑았을 때 이 숫자 중 하나가 나오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당첨 가능성이 느껴진달까. 올해 유일하게 기대를 품은 게 있다면 로또다.
우리 동네에 로또 1등 당첨 명당이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최근에 알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집 근처 카센터 한쪽에 자리 잡은 복권판매처를 두 달 동안 다니지 않았을 텐데. 통계를 내보니 올해 2주에 한 번꼴로 로또를 샀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이 중에 로또에 당첨된 이는 없다. 받은 글로 어느 매체 기자가 이직했는데 당첨됐다더라. 혹은 내 친구 친구의 가족이 당첨됐는데 식의 건너 건너 건넌 이의 얘기만 들릴 뿐이다. 이토록 희박한 가능성에 도전하는 이유가 뭘까. 사실 한 번도 고민해본 적 없다. 그저 기분 좋은 날, 일찍 퇴근한 날, 온종일 재수 없던 날, 갖가지 이유를 들어 사다 보니 하나의 루틴으로 자리 잡았다.
처음엔 진지하게 당첨 가능성을 꿈꾸며 샀다. 월요일에 사면 일주일 동안 기대에 차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확률적으로 금요일에 샀을 때 당첨되는 숫자가 많아지자 금요일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물론 딱 한 번 오천 원 당첨된 사람으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든 서울에 집 구하기가 로또 1등에 당첨돼도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뒤로 잠시 스피또로 노선을 갈아탔다. 스피또는 사자마자 동전으로 긁으면 당첨 결과를 알 수 있었다. 처음엔 혹시나 당첨되면 중간에 뺏길까 봐 집까지 고이 들고 오길 반복했지만, 2천 원만 3번 당첨된 이후로는 그만뒀다.
아무리 성격 급한 나지만 결과를 바로 아는 건 재미 없었다. 그때 알았다. 사실 난 당첨에 의미를 두기보다는 그 과정에 의미를 두는 것이었음을.
로또는 단박에 대화방의 분위기를 바꿨다. 친구들과 하루 치 투정을 나누다가도 "이번 주 로또 샀냐"고 물으면 금세 들떴다. 당첨되면 당장이라도 회사에 사표를 던질 것처럼 기세등등해져선 퇴사 시 내뱉을 대사를 정리해보고 깔깔대며 웃었다.
'로또가 당첨되면'이란 상상은 무한한 확장성을 가졌다. 때로는 당첨금으로 썩은 정치판을 바꿔보자며 서로의 직책을 정해주다가 당첨됐을 때 맛있는 소고기 정도면 진심으로 축하해주자며 도원결의 비슷한 걸 맺었다. 당첨되면 남편에게 알리다 만다, 집을 산다 아니면 주식에 투자한다 등 무한한 밸런스 게임에 빠졌다.
매주 깨지만, 기대하는 무한 반복이 왜 이리 재밌는지, 난 이번 주에도 신나는 대화 주제 "이번에 산 로또가 당첨되면"에 참여하기 위한 오천 원짜리 티켓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