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서에 담긴 환상

에릭 요한슨 전시 Impossible is Possible

by 젤리J

어제 11시에 했던 일도 가물가물한 바쁜 나날이지만 무려 3년 전 일을 어렴풋이 기억나게 하는 건 엽서 덕분이었다. 전시회에서 작품을 감상하고 나오면 아트샵에 꼭 들러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의 엽서를 구입하는 습관이 있다. 한참을 고민하며 고르고 나면 당시의 분위기와 감정이 엽서에 담겨서 꺼내볼 때마다 떠오른다.


거창한 것이 생각나는 건 아니다. 함께 방문했던 사람과 어떤 작품 앞에서 머물렀는지, 그날 관광객이 많았는지 정도가 지나가듯 기억에 남는다. 작가의 생애와 활동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많은 정보를 기억하려면 팸플릿을 모아야 할 것이다. 엽서가 남기는 것은 그때의 감정과 상상, 즉 내가 담은 순간이다. 가장 쉽게 꺼내볼 수 있는 기억인 셈이다.



엽서 뒷면에는 전시의 이름과 작가명, 작품명, 그리고 슬로건처럼 보이는 문장이 공통적으로 적혀있다.

이 문장들은 기억을 헤집어보는데 도움을 준다.



상상을 찍는 사진작가 에릭 요한슨 사진전, Impossible is Possible.



시작은 공간이다. 예술의 전당을 향해 긴 횡단보도를 건너 들어가면 비타민스테이션이라는 이름의 장소가 나온다. 모두가 이곳을 지나 한가람 미술관이나 디자인 미술관, 오페라 극장 등으로 향해 간다. 입장하는 곳이 지하 1층이라는, 약간 헷갈리는 구조이다 보니 헤매는 관람객들도 적지 않다. 조금 익숙해졌다 싶은 지금도 방향을 헷갈리는데 관람객으로 왔던 예전에는 오죽할까 싶다.


하지만 3년 전 그날은 다행히 헤매지 않았다. 관람하려는 전시가 바로 그 지하 1층 비타민스테이션에서 열렸기 때문이다.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이라는 소규모 전시공간은 평소에는 하나의 벽처럼 지내다가 간간이 꾸며져 관람객을 받는다. 3년 전에 가장 인기 많은 전시였던 에릭 요한슨 전시가 열렸을 때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설 정도였다.


모든 작품이 기억나지 않지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양과 구름, 커다란 달. 상상을 찍는다는 사진작가답게 몽환적인 분위기가 넘치는 전시였다. 이 정도만 떠올려도 전시를 보고 온 보람이 있다. 나머지는 찍어둔 사진이나 정성스레 골라온 엽서를 바라보면 된다.


3년 전 전시에서는 세 장의 엽서를 구매했다. 가격이 얼마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다른 기념품에 비하면 부담되는 금액은 아니었을 것이다. 나중에도 떠올리고 싶은 사진으로 고르고 또 고른 세 장의 엽서 왼쪽 아래에는 저마다의 작품명이 적혀있다. 2012년작 Set Them Free, 2017년 작인 Demand & Supply, 2018년작 Falling Asleep이다.



2012년작 Set Them Free

스웨터를 입은 사람이 그림 액자를 기울여 그림 속의 배들을 강에 풀어주고 있다. 크고 작은 배들이 액자에서 나와 자유롭게 떠나고 있다. 이미 먼 곳까지 떠나 흐리게 보이는 배도 있다. 이 작업은 오래 반복되고 있는 것 같다. 사람 뒤로 보이는 액자 속 배들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동트기 전 새벽처럼 아직 어둑한 강에 배를 풀어주는 모습을 보면 이 모든 일은 고요하게 일어났을 것 만 같다. 부모님의 서재에 놓인 액자들을 몰래 빼와 배들을 자유롭게 풀어주는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사람의 얼굴 부분이 잘려있어 우리는 상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상상은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푹 빠져들게 한다.



2017년작 Demand & Supply

수요와 공급이라는 제목에 걸맞게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작품이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정말 신기한 상상이라고 생각하다가도 제목을 보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차가운 그림이다. 이 섬은 한눈에 봐도 불안한 형태이다. 작은 힘이 가해지면 그대로 무너질 것 같은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포클레인들은 계속 암석을 파내고 있다. 파내진 암석들은 위로 끌어올려져 위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쓰인다. 굴뚝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깔끔한 건축물들은 평화롭다는 느낌을 주지만 그들을 지탱하는 바위가 얇아지는 것과 겹쳐져 과욕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수평선 멀리 보이는 섬들도 비슷한 처지다. 다만 아직까지 우리가 우려하는 대로 무너진 섬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 모든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2018년작 Falling Asleep

정말 꿈만 같은 작품이다. 잠에 든 사람은 물론이고 주변의 모든 물건이 허공에 떠있다. 무중력 상태에 놓인 것 같기도 하고 강한 충격을 받아 사물들이 모두 떠오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잠든 사람의 평화로운 얼굴에서 우리는 이 공간이 조용하며 그 어떤 공격적인 충격이 없을 것이라는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옛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우주선이 데려가려는 것일까? 창문 밖 나무들도 공중에 떠올라있고 보름달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마치 꿈과 현실의 혼합을 보여주는 것 같다.





엽서를 보관함에 다시 넣으며 그 안의 수많은 엽서들을 손으로 짚어보았다. 추억이 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만 바쁜 삶 속에 잊고 지내다가 한 번씩 옛 기억에 잠기는 환상적인 일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설렘을 알기에 여전히 미술관이나 여행지에 갈 때마다 엽서를 고르는 일에 열중하는 걸지도 모른다. 폰이나 즉석 사진기 등등 순간을 담기 위한 매개체가 발전했지만 내게는 아직도 그게 엽서인 것 같다.






* 글에 첨부된 사진은 제가 산 엽서를 직접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