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

by 랩기표 labkypy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나를 가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족을 몰랐다. 어느 것도 나를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달콤한 음식도 멋들어진 옷도 그리고 칭찬과 보상도 어느 것으로도 내가 충만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은 일시적인 자극이었고,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져 둔해지고 나는 다시 새로운 것을 원했다. 채워지지 않는 나는 불안했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지쳐갔다.

계속해서 나를 잡아 끄는 생각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순간 명확하지 않고 오히려 흐려진다. 하루 종일 축 쳐져 있게 하거나, 글을 쓰고 싶어 지게 하는 것들이다. 노래를 만들거나 술을 마셔 보거나, 어떤 식으로든 해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 순간 나는 설명하기 힘들고 딱히 이름을 짓기도 힘든 무형의 것에 종속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 않고 그것에 의해서 정의되는 기분이다. 나는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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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태어나는 것은 나의 의지와는 별개지만, 살아가는 태도와 철학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착각일 수 있다. 나의 생각과 행동의 출발은 과연 온전히 나의 의지로 결정된 것이냐를 따져보면 확실하게 답하기 어렵다. 이것을 간파한 영리한 자들은 화려한 술수로 세뇌 작업에 열심히다.

자아란 추상적인 개념일 수도 있다. 고정 상수가 아니라 변수일 수도 있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이라는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를 보더라도 그것은 서로 다르지만 같다. 또한 같지만 다르다. 10년 전의 나의 모습을 두고 그때 당시의 나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나는 그때와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또 같은 사람이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그 둘의 본질은 같다.

그 본질을 찾는 고행길은 언어로 쌓아 올린 언덕을 넘는 것이라 생각했다. 타고 넘고 넘어서 닿으면 어딘가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진리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진리라는 것 또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리는 만물의 관계 속에 있었고, 언제나 변하면서 그 자리에 있었다. 싯다르타는 흘러가는 강물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개념을 뛰어 넘은 오만상의 모습을 보며 그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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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는 부유한 집안의 자식이었다. 가문과 전통을 중시하며 많은 기대를 받고 자랐지만, 어느 순간 부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공허함을 채우려 수행 길을 떠난다. 학식이 높았던 그는 수행자 사이에서도 두각을 나타낸다. 수행 길에 부처 고타마를 만나지만, 도는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곧 위대한 자의 곁을 떠나 속세에 머물게 된다.

기생으로부터 사랑의 기술을 배우고, 상인으로 부터 상술을 배웠다. 그는 속세의 사람들을 보고 생의 유희에 빠진 어린애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자신 또한 부가 쌓이고 대인관계가 넓어지면서 그가 비웃던 처지와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큰 정원이 딸린 집을 성큼 걸어 나와 다시 길을 떠난다. 도심과 숲의 경계에 있던 강을 건너게 도와주던 뱃사공을 만나 함께 지내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완전한 자가 된 것 같았지만, 사랑을 가르쳐줬던 기생이 아들을 남기고 간 후 그는 스스로를 기만했다. 아들에게 집착했고, 아닌 것에 아니라고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진리와 그것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아들의 것은 아니었다. 아들은 괴로움에 도망쳤고 싯다르타는 좇아 가지만 곧 깨닫는다. 절대 진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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싯다르타가 처음 수행 길을 떠날 때는 친구와 함께였다. 그리고 자신이 부처의 곁을 떠날 때, 친구와 헤어진다. 후에 친구와 두 번의 재회를 하는데, 한 번은 부자가 된 뒤 다시 길을 떠난 직후이고 또 한 번은 뱃사공 곁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그 뱃사공의 뒤를 이어 나룻배를 몰고 있을 때였다. 친구는 두 번 다 싯다르타를 알아보지 못한다. 싯다르타가 둘의 추억을 이야기할 때 비로소 알아본다. 그리고 친구는 그의 변화된 모습에서 이야기를 찾고 가르침을 갈구한다. 하지만 싯다르타는 가르칠 수 없는 깨달음 ‘옴’을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달라는 친구의 부탁에 싯다르타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고 친구는 자신의 얕은 지식과 경험을 통해서 부질없는 해석만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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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하는 삶이 상대적으로 세상에 무관심하거나 나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하는 사례가 많다. 하지만, 초월적인 삶이란 이처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느끼는 것뿐이며 그것을 나를 포함한 실체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는 행위이며 그곳에 질서와 패턴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를 헛된 것에 쏟지 않고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하여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싯다르타가 노를 저으면서 강물의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듯이 우리가 지금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으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 깨달음이란 결국 말보다는 행위로 이어지는 것이다. 사유하고, 인내하고, 단식하는 능력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싯다르타처럼 그것을 통해 우리는 충분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록 이처럼 불필요한 말들을 쏟아 내고는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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