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에린 작가님의 책이 도착했다. 서평을 쓰겠다고 신청했더니 고맙다는 인사와 따뜻한 인연을 돈독하게 다지는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브런치에서 에린 님을 볼 때마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파란 눈에 흰색 털을 가진 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보지 못하는 저 먼 곳으로 날아가 하늘 위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항상 새로운 풍경을 보여주었다. 그러다가 사람의 소리가 궁금해지면 땅을 딛고 서서 가만히 바라보고는 아쉬움마저 여행의 묘미라는 노래를 부르고 자리를 떠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 작가가 거품을 잔뜩 품은 맥주를 자주 마시길래, 나도 덩달아 기분을 보탤 겸 차가운 맥주를 냉장고에서 꺼내 한 모금 마시면서 읽어 나갔다. 브런치에서 읽었던 글들도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책이 주는 질감이 활자에 더욱 활력을 넣어줬기 때문인지 더욱 근사해 보였다. 작가의 필력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낯선 곳을 바라보는 친근한 태도에 더욱 따뜻해지는 세상과의 관계 맺음이다. 편안하게 읽힌다. 이번 주말이면 조지아 여행이 끝날 것 같다.
5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는 노래가 선명해지는 봄 날이다. 그 푸르름을 누리기에 앞서 4월에는 혁명과 죽음과 식민지 사관을 넘어서는 힘겨운 여정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새워진 날도 4월이고 이후 일제 잔재가 청산이 되지 못해 부패로 가득했던 무능한 정부가 300명이 넘는 목숨을 차가운 바다 깊숙이 가라앉게 만든 날 또한 벚꽃이 폈다가 지는 4월이다. 부패한 권력을 끌어내리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법통을 이어간다는 헌법에 새겨진 혁명의 날도 4월이다. 그리고 2020년 4월에는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치러졌다.
투표 결과를 두고 수많은 칼럼과 기사 쏟아져 나왔다.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한 줄로 요약한다면 새로운 보수의 등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의 주류 세력의 몰락이다. 감정에 호소하고 기득권에 목메달며 유지했던 그들의 질긴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보수란 자유와 전통을 지키며 점진적인 변화를 원하는 부류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이 땅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왔던 것은 단연코 식민지 사관에 물들어 있는 그들이 아니라 조금이나마 상식적인 시대를 살아가자고 노력했던 그들이다. 이제는 새로운 보수가 등장해서 새 길을 여는 진보와 건전한 경쟁, 품격 있는 정쟁이 이뤄지기를 바라본다.
과거의 행적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에는 다소 소모적이다. 이 또한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자에게는 어제의 기억보다 오늘의 노력이 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 나의 노력과 나의 행동과 나의 자존감과 나의 지식과 나의 경험과 더불어 함께 국가 미래를 결정하는 나의 표는 더없이 중요하다.
나의 지역구는 뜻대로 되지는 않았지만 인정한다. 그것이 영남의 고립이라는 등의 말들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인정한다. 모두가 같을 수는 없다.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다. 김부겸 전 장관의 말처럼 밭을 탓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히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제는 무엇이 문제였고, 그 변화를 선도하는 주체가 되는 길이 남았다. 종교에서 최고의 전도는 나부터 믿는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어느 편에 속해 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건 있다. 적어도 4월의 비극은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상식이 통하고 정의로운 가치가 실현될 때이다. 나를 대표하는 자를 뽑는다면 그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를 그것을 돋보기 삼아 톺아볼 필요가 있다. 나부터 시작이고 끊임없이 질문해야 된다. 질문이 사라지고 대답이 석연치 않으면 또다시 불행한 내일로 돌아가는 징조다.
선거날은 태양절이었다. 북에서는 김정일 탄생을 명칭 하는 것인데, 나에게는 사랑하는 지상이 엄마의 생일이다. 코로나 19 여파로 처가에 자주 가지 못했다. 장모님께서는 익숙하지 않은 인터넷 강의 준비로 심신이 지쳐 있어 사위와 손자를 맞이할 여력이 없으셨다. 그래서 아내는 생일날 처제와 함께 둘이서 처가에 깜짝 방문을 하기로 했다. 덕분에 나는 지상이와 함께 보냈다. 나를 올라타고 얼굴을 때리고 분명하지 않은 말투로 “나는 미니 특공대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레이저 총을 쏘았다. 나는 쓰러지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보였다. 그러다 문득, 창 밖으로 보이는 바깥 날씨가 아주 좋아서 지상이를 킥보드에 태워 가까운 강 주변으로 나갔다. 지상이는 보이는 개미와 꽃과 나비에게 인사했다. 강에서 물 밖으로 순식간에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는 민물고기를 보며 놀라워했고, 산책로 주변에 작은 잎에 달려있는 정체불명의 열매를 떼어냈다. 그리고는 작은 손으로 하나 둘 강에 던지면서 “물고기야 이거 먹어”라고 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한참을 그렇게 놀다가 갑자기 초콜릿을 달라고 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지상이가 겨우 낮잠을 잤다가 깨어 엄마를 찾아 대성통곡을 하니 저녁이 되었다. 그때즘에 수유는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좋았다고 했다. 오랜만에 처가 식구들만 옹기종기 편안하게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얼굴도 더 밝아 보였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막걸리와 맥주를 나눠 마셨다. 좋은 선물을 해주지 못해서 마음이 허전하고 미안했다. 수유는 조용히 나중에 좋아지면 그때 생각하자 했다. 티는 못 냈지만, 울컥했다. 다른 어느 때보다 조용하게 지나갔지만 그래서 더욱 기억하게 될 태양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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