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 피로스마니
니코 피로스마니
PIROSMANI, NIKO
무엇이었을까.
그토록 숨 막히는 삶을 붓으로 헤쳐나갈 수 있게 해 준 힘은 무엇이었을까. 삶은 언제나 무리한 요구를 해오지만 결단코 우리는 그것에 지치지 않아야 한다. 그 순간을 지켜내는 것은 나를 잃지 않는 것이며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는 굶어 죽었다. 흑해를 뒤로 두고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 자리 잡은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 어느 건물 지하에서 영양실조로 인한 간 기능 부전으로 죽었다. 러시아 식민지 시절 그루지야로 불리던 그의 나라는 조지아라는 이름을 되찾고 그의 예술적 투혼과 뛰어난 창작성을 기념하며 지폐에 그의 얼굴을 새겼다.
그는 배고픈 배를 부여잡고 몇 모금의 물과 술을 마시며 그림을 그렸다. 당대의 멸시는 배고픔처럼 그에게는 운명적이었다. 배우지 못해 무시당하고 가난한 가정에 태어나 헐벗은 것은 그림을 그리지 못할 정도의 장애가 아니었다. 남들은 간판이나 그려주고 남은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그를 비웃었겠지만, 그는 빛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반백년을 겨우 살다가 죽었다. 사후에 화가 피카소, 건축가 안토 타다오 등의 후대 창작자들 가슴에 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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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조지아 여행서 두 권째 읽고 있는 중이다. 권호영 작가와 현경채 교수님의 것인데 같은 곳을 다녀와도 다르게 쓰였다. 하지만 피로스마니의 사랑 이야기는 똑같이 다루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심수봉 님의 노래 ‘백만 송이 장미’의 원곡이 그의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그는 여배우 마가레트를 사랑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고 피까지 뽑아 마련한 돈으로 백만 송이 장미를 준비해 그녀에게 고백했다고 한다. 어느 영화에서 봤던 그와 비슷한 장면을 가져와 상상해보니 엄숙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끝내 사랑으로 피어나지 못하고 꽃이 시들기 전에 져버렸다고 한다.
‘그녀를 처음 본 것은 극장 앞이었다. 그녀는 순회공연을 다니는 연극단 소속의 배우였고, 단연 그녀는 그 무리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연기를 돈으로 사서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운 좋게 극단에서 나에게 그림 의뢰를 하여 리허설을 볼 수 있었다. 무대 위 그녀는 더욱 아름다웠다. 그녀의 말과 몸짓은 나의 온몸을 지배했다. 조용히 혼자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언젠가 나는 그녀에게 직접 나의마음을 전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라고 그와 그녀의 만남을 상상해본다. 사다리에 걸쳐 몸을 반쯤 돌린 그와 무대 위에서 뜨거운 눈 빛으로 연습을 하는 그녀.
그리고 그는 그녀의 그림을 그렸다. 고백 전후를 알 수는 없다. 추측컨데 분명 고백 전에 호의로 그렸을 것이다. 그녀를 집으로 초대해 그림을 그리는 동안 설렘으로 붓질을 했을 것이다. 이미 완성된 그림에 덧칠하며 쓸데없는 말을 연이어 쏟아 냈었을 것이다. 그녀가 혹시나 볼까 더러운 것들은 서랍 구석에 처박아 두고 낡은 옷을 빨아 말려 입었을 것이다.
그에게 그림은 삶이 살만하다는 유일한 안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것은 삶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미워하는 마음 없이 백만 송이 장미를 바쳤을 것이다. 그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삶이 구원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살만한 세상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아직도 사랑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젔을 때 사랑할 것이 남아 있어 괴로워했을까. 아니면 떠난 사랑과 비참한 현실의 마침표를 찍는 것에 고마워했을까.
대체로 그의 그림은 어둡다. 그리고 배경은 원색으로 단순하게 처리되어 있다. 주변에 보이는 풍경과 군상들을 그렸다. 그가 바라봤던 세상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 그의 그림은 그가 살았던 도시에 근사한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직접 보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멀리서 나는 어둠 속으로 침잠되어 사라져 간 그의 생을 내 맘대로 글을 써 기억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