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eynote

지상이는 언제나 놀이터에 나간다

육아

by 랩기표 labkypy

https://youtu.be/bVd3ZHipNiU




지상이는 언제나 놀이터에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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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중에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가면 지상이는 어김없이 나갈 채비를 하고 현관문을 반쯤 열어둔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인사할 겨를도 없이 가방을 벗어 거실 한구석에 던져두고는 나를 태우고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다시 부른다. 분명, 퇴근 버스에서 졸면서 두 다리 쭉 뻗는 것을 꿈꾸며 왔지만, 그 순간은 신기하게도 피곤이 달아난다.

지상이는 항상 엘리베이터 입구에 부착된 위 아래 화살표 두 버튼을 모두 누른다. 빨간 불이 들어오면 “아빠, 제가 뭔가 일을 잘 처리했어요”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하나만 누르는 거다.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을 매미처럼 아무 의미 없이 또 반복한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면 지상이는 안전 핸드레일을 잡고 발을 구른다. 나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려 또 매엠 같은 잔소리를 할 요량으로 지상이를 쳐다본다. 지상이는 잘못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장난기 어린 눈 빛으로 웃는다. 그걸 보는 나는 그냥 픽 웃고 지상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하고 투명한 아파트 입구 문이 열린다. 지상이는 잡은 손이 곧 떨어질 것 같은 속도로 뛴다. 그리고 저 멀리 놀이터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친구”라는 말을 몇 번 되뇐다. 나는 “누나야 인마”라고 바로 고쳐 주지만 지상이는 여전히 친구다. 그래 아빠가 생각이 짧았다. 누나고 형이고 동생이고 말도 잘 안 통하는 너랑 놀아주고 이뻐해 주고 반가워해주면 그냥 친구지 뭐. 오래된 벗이라는 의미를 두고 너의 생을 따져보면 그리 짧은 시간은 아니니깐 맞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지상이 친구들은 나와 어느새 익숙해진 사이다. “안녕하세요”라던가 “어서 오세요”와 같은 인사는 없다. “지상이 왔다”라는 말과 함께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치면 이 아저씨가 또 왔구나 하는 정도의 감정을 서로 주고받는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면 매번 한두 명의 새로운 인물들이 있는데, 어쩌면 자꾸자꾸 놀이터에 나오다 보면 이 동네 어린이들을 다 만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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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에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키가 제일 큰 여자아이는 항상 리더역을 맡고 있다. 게임의 종류를 정하고 룰을 알리고 각자의 역할을 부여한다. 그에 따라 나머지 6~7명의 아이들 사이에는 규칙이 생겼고 그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네 주변에 설치된 무릎까지 오는 철 울타리에 매달리거나 꽈배기 같은 미끄럼틀 위로 뛰어다니기도 한다. 나로서는 그 게임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다. 분명한 건 그들은 그 안에서 아주 즐겁게 몇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그들은 같은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반복되는 게임을 몇 날 며칠 동안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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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하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루덴스’라는 용어는 우리가 특정한 규칙을 가지고 의식을 지내며 살아가는 형태가 놀이와 비슷하다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그에 따른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내가 매일 반복하고 싶은 놀이 같은 일상을 가지면 그것보다 즐거운 삶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무엇을 하는 것보다는 누구와 함께 하는가 그리고 나는 오늘도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는 인생 즐거움의 중요한 척도이다.

지상이는 분명 내일 아침에 눈을 뜨고 잠에서 해방되면 어설픈 말투로 밖에 나가자고 할 것이다. 그리고 “친구”라는 말을 뱉을 것이고 이른 아침에 친구가 없는 놀이터에 도착하면 흥미를 잃고 고개를 숙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이나 찾으면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문득 나는 지금 어딘가 갔다가 다시 돌아가는 길인가 아니면 즐겁게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중인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지상이는 오후가 되면 다시 나가자고 조른다.


그렇게 지상이는 언제나 놀이터에 나간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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