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디즈니만이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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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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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아이거
“크게 생각하고 멀리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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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롬본 오일 제조 사업에는 뛰어들지 말라. 세계 최고의 트롬본 오일 제조업자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세계 전체의 트롬본 오일 소비량은 연간 수십 리터에 불과하다.”
나와 회사의 자원을 빨아먹으면서도 돌려주는 것은 많지 않은 작은 프로젝트에 투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여전히 그 메모를 책상 서랍에 보관하고 있으며, 무엇을 추구하고 어디에 에너지를 쏟을지에 대해 경영진과 대화를 나눌 때 꺼내서 보여주곤 한다.
by
로버트 아이거
(전 디즈니 CEO)
책에서 몇 번이나 강조했던 말이다.
크게 생각하고 멀리 봤던 그의 경영철학이 무엇인지 떠나보자.
*
일요일 아침이면 디즈니 만화동산을 보기 위해서 설레었던 기억이 있다. 이불을 몸에 둘둘 감고 눈곱 낀 눈을 티비에서 떼지 못했었다. 귀 큰 생쥐와 말이 빠르고 많던 욕심꾸러기 도널드 덕. 일주일 꼬박 기다려 한 시간도 채 안 되게 펼쳐지는 그들의 에피소드는 어린 시절 큰 기쁨이자 즐거움이었다. 그 뒤로 디즈니는 내게서 지워졌다. 이렇다 기억에 남는 캐릭터도 스토리도 없었다. 애니메이션은 픽사 작품으로 대체되었고 코믹스는 만화책을 뚫고 실사로 만들어져 디즈니 유년을 보냈던 어른들을 흥분시켰다. 스타워즈 개봉은 종교 집회를 방불케 하는 정도였다. 현실을 어루만지는 상상 속의 세계에서 디즈니는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얼음을 몰고 다니는 공주 엘사가 불렀던 노래 ‘let it go’를 모든 사람들이 입에 물고 다녔다. 유치하다며 한사코 그 유행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결국 호기심으로 보게 된 겨울 왕국은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었다. 어둑한 영화관에서 작은 탄성과 박수로 감상을 마무리할 때 즈음에 이 영화가 디즈니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디즈니라니!
이후 10년. 세상 거의 모든 만화 캐릭터와 히어로는 디즈니 가족이 되었다. 놀라웠다. 갑자기 왜?!
이 눈부신 거대 그룹으로 재탄생한 디즈니의 중심인 전 CEO 로버트 아이거의 자서전 The Ride of Lifetime(디즈니만이 하는 것)이 발간되어 반갑게 읽었다.
우선, 경영서로써 좋은 책이다. 쉽게 접히지 못했던 디즈니 경영일선의 이야기와 M&A 과정 그리고 리더십에 관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책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도 전인 1923년에 월트, 로이 디즈니 형제가 세운 월트 디즈니는 그로부터 약 100년 뒤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미디어 콘텐츠 기업으로 성장한다. 애니메이션계의 혁신 아이콘 스티브 잡스의 픽사와 손잡은 이후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 같은 동물 친구들에서 토이스토리 우디와 버즈 등의 장난감 친구들과 마블 히어로즈 그리고 스타워즈 군단까지 거느리게 되었다. 이후 방송 미디어의 전설 루퍼트 머독의 21세기 폭스까지 집어삼키며 아바타 2까지 내년 개봉일 앞두고 있다. 이 밖에도 ABC방송(ESPN등) 까지 스포츠, 뉴스 미디어 업계도 장악했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에 제공될 예정인 OTT(Over The Top) 서비스 디즈니+라는 자체 유통 채널까지 갖추면서 더욱 그 규모는 확장되고 있다.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디즈니 또한 수만 명을 감축하는 등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얼마 전 무리하게 디즈니랜드 재개장을 추진하면서 대중 미디어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부 대중들은 이 거대한 미디어 공룡 회사가 미디어를 독점하고 콘텐츠의 상업성에만 집중하다 보니 오히려 업계의 창조성을 죽이고 있다며 나쁜 기업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한다.
로버트 아이거는 1974년 ABC(1996년 디즈니가 인수)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2005년에 디즈니 CEO가 된다. 이 책은 그의 자서전이다. 책의 말미에 ‘이 책은 리더십에 관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처럼 그가 직장생활 동안 창작집단에서 리더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담겨있다.
책에서 그의 회사생활은 아주 일사천리 부러울 것 없이 잘 풀린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책에서는 마치 정해진 순서대로 진행되는 회의처럼 말단 직원, 관리자, 부사장, 사장, CEO가 되는 과정이 아주 순탄하게 그려져있다. 43세 부사장이 된 그를 보면서 디즈니 시총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회사에 다니는 40대를 앞두고 있는 나는... 자괴감이 들뿐이다. 그의 이력과 배경 그리고 학벌 등은 대단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커리어에 중요한 요소도 아니었다. 그의 성장 배경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책에 따르면 자신의 타고난 기질이 크게 작용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낙천적이다. 난관에 부딪히는 순간이 오면 발을 동동 구르거나 쓸데없이 말이 많아지고 잠을 못 자는 등의 부류가 아니라 주변 누구보다 쿨한 태도로 문제를 직면한다는 것이다. 옆에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등 뒤에 식은땀이 흘러도 상황 파악이 빠르고 침착하게 최선의 방법을 고민하는 부류일 것이다.
디즈니에 대한 그의 철학은 세 가지다. (1) 고품질의 콘텐츠를 만들고 (2) 기술을 중시하고 (3) 글로벌한 성장이다. 아주 간단하고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다. 세계 초일류 회사를 지향한다거나 초격차를 만든다는 슬로건과 다를 바 없다. 내 꿈은 대통령입니다라고 말해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인 것처럼 밥 아이거의 슬로건 또한 혜택 받은 소수의 그것처럼 공허하게 들릴 뿐 공감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이 세 가지 철학이 나온
시기와 의미는 중요했다.
디즈니는 월트 디즈니가 죽은 이후 끝없이 추락했다. 디즈니는 위기탈출을 위해 여러 번 CEO를 교체하다가 1984년 ‘파라마운트 픽처스’ 마이클 아이즈너를 CEO로 영입한 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2000년대부터 아이즈너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경영방식은 창조성을 요구하는 집단과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맞지 않았다. 제2인자를 두지 않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만 급급하다가 회사는 다시 위기를 맞는다.
이때 디즈니 이사회는 다시 한번 CEO를 교체하기로 한다. 내외부 인사 후보 검증에 들어가게 되고 당시 COO였던 밥 아이거가 강력한 후보로 떠오른다. 조직문화를 바꾸기 위한 대안이 기존 인물을 내세운다니 조금 어불성설인 것도 같았다.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이사회진들에게 그는 이 세 가지 철학을 확고히 하며 강력하게 어필한다. 결국 그는 힘겹게 CEO가 되고 이후에 권력을 각 사업부에 분배하고 의사결정을 신속히 하는 구조를 갖추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문화로 바꾼다.
마치 미래전략실을 해체하는 어느 기업과 로마, 페르시아, 몽골이 거대 왕국을 건설했을 때 피지배 문화를 인정하고 인재를 고루 채용했던 것과 비슷하다.
결국 훌륭한 철학이 조직 문화를 바꾸면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한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부터 잘못을 바로잡고 관례와 정통을 벗어나 주체적으로 상식 밖의 인수합병을 통해 기술을 유치하고 인재를 들임으로써 위기를 벗어났다.
단순하지만 이 확고한 철학 위에서 현실을 해석하고 창조하는 동력을 얻게 된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지만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목표로 단순하게 집요함으로써 회사는 거대한 분기점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우선순위가 확실해진 것이다. 이후 그는 혁신 아니면 죽음이라는 생각으로 임직원 보상체계까지 다 바꾼다.
변모한 디즈니는 하나의 틀에 묶이지 않고 최고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 기술력과 조직문화가 우수한 픽사부터 인수한다. 그 과정에서 스티브 잡스와의 일화는 우리가 몰랐던 우리 시대 천재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또한 마블, 루카스 필름 그리고 21세기 폭스를 인수하는 과정의 서사는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관련하여 수많이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만큼의 각자 다른 에피소드가 있겠지만, 결국 수장의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또한 모든 결정은 논리보다는 감정적인 것들, 품격과 고결함 그리고 자부심의 문제였다는 사실은 비즈니스란 과연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더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후 디즈니는 세계 최고 미디어 기업이 된다. 현재 전 세계 창의 집단 중 가장 크고 강력하다.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최고만을 고집한다는 것이 거대 자본을 투자해 그만큼의 수입을 얻기 위한 것만이 아니기를 바란다. 기술을 중시한다는 것이 껍데기만 화려하지 않기를 바란다. 글로벌한 성장이 프랜차이즈화 된 미디어 시장을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
“세상이 하는 말을 지나치게 믿기 시작하는 순간, 어느 날 거울을 보며 이마에 자신의 직함이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미 삶의 방향은 사라진 것이다. “
- 밥 아이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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