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슈 / 김윤경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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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삶의 철학은 무엇이냐?” 김이 물었다.
“무슨 소립니까. 저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냥 사는 거죠.... 음.. 생각해보니 사실 저는 크리스천이에요. 성경 말씀을 믿고 따릅니다.” 박은 갑작스러운 물음에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삶과 행동에 명확한 기준이 있다는 사실에 뭔가 으쓱했다. 그리고 이어서 다시 김에게 질문했다.
“선배는 그런 거 있어요... 철학?”
“글쎄다... 삶의 철학이 뭔지를 떠나서 철학은 좋아하긴 하는 것 같은데, 사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김은 혼자서 홀짝 술을 한 잔 마시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래도 나는 철학이 좋아. 사유를 한다는 게 쓸데없어 보이지만 마치 의사가 신체를 해부하듯이 이 신기한 세상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거든. 이건 이렇게 생겼고, 저건 저렇게 생겼네. 이건 이렇게 굴러가는 데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생각이 들어. 그때 철학자의 말을 빌려서 대입해보면 그럴싸한 답이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하나 배워서 신나게 남 앞에서 떠들어대다가 어느 날 고수를 만나게 되는 거야.
애초에 문제 정의가 틀렸다. 뭐 그런 식으로 나에게 이야기를 해. 나는 나름의 반박을 해보지만 결국 어느 순간에 막혀. 그게 내 한계인 거지. 쌓아 올린 책 위에 서서 담장 너머를 보는 그림 알지? 뭐 그런 기분이었다가 갑자기 담장이 더 높이 솟아올라버리는 거야. 당황스럽지만, 자연스럽게... 다시 책을 보게 되고.. 또 희열을 느끼게 되고... 나름 재밌어.” 김이 말을 끝맺고 다시 혼자서 술을 마시려고 하자 박이 서둘러 잔을 부딪혔다.
“저는 선배의 이런 현학적인 말씀들이 좋습니다.ㅋㅋ”
“쓸데없다. 쓸데없어.” 김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박이 “책 하나 추천해주세요.”라고 살갑게 말하자. 김은 “최근에 읽었던 게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인데 그거 한 번 읽어봐라. 재밌어. 재밌다는 게 너무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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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 며칠 뒤 주문한 책을 펼쳤다. 50명의 철학자를 소개하면서 그들의 사상과 이론을 돋보기 삼아 지금의 현실을 들여다보며 설명을 붙여두었다. 저자는 철학과를 졸업했다. 아주 유명한 경영 컨설턴트였고, 수많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은 단연코 철학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학사 졸업 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배운 지식을 무기 삼아 경영 전선에서 승리의 팡파르를 울리고 있었다. 없는 것에 목말라하지 않고 가진 것을 충분히 활용했다는 그런 류의 말이 떠올랐다.
박은 회사원이기에 경영과 철학의 접목이라는 책의 컨셉에 따라 흥미롭게 읽었다. 작가의 필력 또한 훌륭했고, 그의 필체 속에서 유머러스하고 열정적이고 아주 직설적인 사람이 앞에서 강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책 속 내용은 알찼다. 소개된 말대로 지루한 ‘철학 역사 탐방’ 같은 틀은 벗어던지고 시기 구분 없이 나열된 철학자 들의 소개와 경영 인사이트는 지금 나의 상황에 당장 적용해도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고 박은 생각했다. 박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이 철학 개념과 이렇게 절묘하게 결합되어 해석될 수 있구나 하며,
‘해부를 집도하는 의사 같다’는 김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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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는 혁신전략을 짤 때입니다. 각자 아이디어 하나씩 준비해서 내일 만나기로 합시다. 우수 아이디어는 상금도 있으니 최선을 다해주세요.”
“팀장님, 아이디어는 보상을 한다고 해서 억지로 급하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비로소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김이 말하자 회의실은 일순간 적막이 흘렀다. 잔기침 소리와 함께 팀장이 말했다.
“무슨 소리야! 보상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어딨어? 김 과장은... 항상 엉뚱한 소리를 한다 말이야. 회사가 장난이야? 지금 회사가 어렵고 혁신 아니면 죽는다고 하는 판에 배부른 소리나 하고 있고... 아휴...”
팀장의 성화에 김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박은 그런 선배를 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에드워드 데시 교수다!’ 자발적 동기를 촉진하기 위한 팀장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에 박은 동의 했다. 그리고 변화는 그렇게 쉽게 오지 않는 사실을 목격했다. 새로운 시작은 과거와의 이별에서 시작되지만 이 거대한 조직에서 과거를 지우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선배가 입을 다문 것은 사람은 결코 논리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플라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라고 짐작했다.
박은 밖으로 나와 혼자서 생각에 잠겼다. 잘못된 부분이 많은 데 왜 사람들은 알지 못할까. 그리고 세상은 정해진 바가 없는 데, 왜 답이 있는 것처럼 행동할까. 내가 했던 말을 자신의 지식 테두리 안에서 일반화시키고 결론을 단정할까. 박은 몰려오는 고민에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뭐해?” 김 선배였다.
“아. 그냥 고민이 많아서요.. 선배, 아까 팀장께 말씀하셨던 부분 저는 동의합니다.” 김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다. 쓸데없어... 그래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말하긴 했는데 딱 거기까지가 내 용기의 한계인 것 같아.”
“그래도 저한테는 멋지십니다.”
“사실 나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알고자 하는 노력과 최대한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식으로 해석하고 적용해보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이야. 그 책에서 ‘브리콜라주’가 소개되어 있던 거 기억나? 난 그냥 그렇게 살고 있어. 돈이든 뭐든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보는 거야. 내 꿈은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거야. 그냥 그렇게 사는 데, 다양한 철학들이 와서 부딪히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는 기분이야. 결국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냐가 답이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결과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과정이 될 것 같아서 그냥 즐겨야겠다는 이런 태평한 소리나 하고 있고, 조금 우습기도 해.”
말이 끝나자말자 김은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급하게 인사를 하고 사무실로 달려갔다. 박은 혼자 남아 더 큰 고민 속을 헤맸다. 나는 누구이고 내가 속한 사회는 무엇이며, 지금 나의 삶은 또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가. 이때 책 서문이 생각했다.
‘교양 없는 전문가야 말로 우리의 문명을 가장 위협하는 사람이다.’ / 로버트 허친스, 전 시카고 대학총장
박은 교양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철학자가 현상을 바라보고 문제를 정의하는 태도가 왜 중요한지 서서히 깨닫고 있었다. 그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이 주관하는 아이디어 회의는 뻔하게 마무리되겠지만, 나의 인생은 그렇게 뻔하게 굴러가도록 두고 싶지 않다고 박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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