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eynote

브런치를 하다

그리고, 넷플릭스 리뷰단에 떨어지다.

by 랩기표 labkypy

떨어진 것 같다.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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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갑자기 공부를 잘하게 되었다. 그때는 나의 정체성이나 의지 같은 것들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성적이 오르고 장학금까지 꼬박꼬박 타가며 학원도 공짜로 다니게 된 정확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그저 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는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이 뛰어놀아도 서로가 다른 세상을 살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달라진 표정과 덩달아 솟아오르는 어깨와 넘치는 자신감으로 중학교를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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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6학년 1학기까지의 생활은 학교-집-바다였다. 조부모와 함께 사는 가난한 촌동네 코흘리개 아이에게 주어진 무간섭의 시간은 언제나 놀이에 집중되었다. 별의별 것을 잡고 구워 먹고 바닷물에 들어가고 쓸데없이 돌아다니고 비가 오면 비 오는 대로 젖어서 좋고 날 맑으면 맑은 대로 뛰어다니기 좋고. 학교에서는 숙제 안 했다고 한 대 맞고, 성적이 낮다고 한 대 맞고, 무서운 형들은 돈 없다고 한 대 때리고. 그때를 기억하는 주변 친구들은 내가 당신들을 괴롭힌 것은 기억 안나냐고 따지지만, 진짜 기억에 없다.


그러던 날들이 이어지다 6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들과 이별 인사도 못한 채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고 시골에서 읍내로 전학을 갔다. 이후 나의 일상은 학교-학원-집이 되었다. 작은 마을이었지만 드넓었던 세상은 예전보다 큰 도시지만 좁게 살아야 하는 곳으로 변했다. 그런 환경에서 나는 거짓말처럼 할 것이 공부밖에 없었고, 어색한 가족생활을 피하기에도 안성맞춤이라 금방 적응했다. 그랬더니, 문제 많은 말썽꾸러기는 눈 깜작할 사이에 모범생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위기를 극복한 어느 기업 스토리처럼 바닥에서 수직 상승한 나의 성적을 보고 저 멀리 시내에서 갓 오신 국어 선생님께서 나를 교무실로 불러 세우고는 말씀하셨다.


“이번 독후감 대회는 기표가 대표로 나가보자”


글이라니


내가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던가? 몰래 맘 속으로 그동안의 나의 서재를 돌아보니, 얼굴이 붉어질 뿐이었다. 독서도 독후감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그렇게 나는 선생님께서는 연습이라고 했지만 일종의 오디션같이 독후감을 써냈고 그에 대한 선생님의 피드백과 표정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아... 기표야 우리 다음에 해보자” with :(


이후로 나는 미친 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반에서 공부 좀 하는 친구가 읽는 책은 경쟁하 듯 따라 읽었고 주말은 도서관에서 살았다.(야설이 좋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 나는 음악을 하면서 가사를 직접 쓰거나 기획 일로 시나리오를 썼다. 그렇게 가까워지고 친근해진 글은 어느새 무엇보다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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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많은 일들로 인해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빼고는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공부와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고 블로그를 운영한 지 3개월이 되었다. 지인의 추천으로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더니 며칠 뒤에 부끄럽게도 이메일로 안녕하세요 작가님이라고 불러주었다. 브런치 피드를 둘러보던 중에 평소 즐겨보는 넷플릭스 평가단 이벤트가 있어 내친김에 응모했지만,


떨어진 것 같다.. 떨어졌다.


당연히 되지 않을까 생각을 했었고, 예상이 빗나가자 아쉬웠다. 그 아쉬움은 저녁이 되자 그렇게 되뇌었던 집착은 번뇌다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나 스스로를 책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게 또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다고 읽지를 않을 것이냐, 여행을 가지 않을 것이냐, 쓰지를 않을 것이냐 자문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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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블로그 해보니깐 대단하신 분들 많드라. 그래서 나름 결론은 이 미약한 존재가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좋아서 하는 일을 하다가 좋은 추억을 많이 가져가는 것일 뿐인 것 같다고 불알친구들 단톡방에 적었더니 서로 개똥철학을 농담 삼아 주고받으며 낄낄거린다고 손가락이 바빠졌다. 그러다 갑자기 전화 한 통이 왔다.


'선생님, 잘 지내시죠? 취향과 플랫폼에 대한 글 청탁하려고 합니다. 요즘 블로그도 하시는 것 같은데...'


뭐 새옹지마라고 적어두고 슬쩍 웃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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