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떠날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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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
‘나는 누구인가’
라는 다소 추상적인 질문이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닿아 현실적인 답으로 연결될 때 우리는 크게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 번째는 현실의 수긍이고 두 번째는 현실의 부정이다. 수긍의 나는 하루를 묵묵히 견디며 변치 않을 내일의 걱정으로 잠이 든다. 부정의 나는 지난날에 대한 회의와 자괴로 조금은 삐뚤어져 비틀거리겠지만, 새로운 내일을 꿈꾸며 잠든다.
두 인간상을 두고 옳고 그름 또는 좋고 나쁨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왜’라는 의미를 둘 수 있다면 그것으로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 당장의 슬픔도 내일의 기쁨의 원동력이 될 수 있고, 또 그 반대로 오늘의 기쁨은 내일의 아픔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때문에 그 어떤 인간의 부류가 되던지, 그로 인해 어떤 삶을 살게 되더라도 중요한 것은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다시 또 어떻게 구성하고 이어갈 것인가라는 의지가 중요하다. 어쩌면 인간이 유일하게 품을 수 있는 삶의 희망과 낙은 이 현실적 몽상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다.
시인이 되고 싶은 그녀
책에서 주인공은 현실에 안착하지 못한 여인이다. 공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하나 제대로 해내야겠다는 목표가 없었다. 가야 할 곳이 뚜렷했던 산업화 시대의 대한민국은 그녀에게 안락한 삶을 안겨주지 못했다. 기능적으로 효율이 떨어지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쩔 줄을 몰랐다. 다행히 그녀는 좋아하는 것이 생겼다.
바로 시였다.
그녀는 시가 좋았고, 시인이 되고 싶었다. 여동생의 도움으로 야간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교환가치를 획득했다. 시인이 되기 위해서 애쓰며 했던 일은 아주 단순했다. 시와 가까이, 아주 가까이 지내는 것이었다. 서점에서 종일 시집을 읽거나 집으로 와서 탐독하고 문장들을 필사했다. 시인이 되는 자격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그녀는 그저 좋아하는 것을 남들보다 더 절실하게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는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다. 시를 쓰는 것이 경쟁의 수단이 되자 그녀는 또 한 번 방황하게 된다. 그리고 졸업 후 그녀는 등단하는 동기들을 보며 의문을 던진다.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을까’
그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밤 길 같은 그녀의 삶에서 유일하게 주어진 작은 불씨는 필사였다. 필사의 밤은 깊어가고 문장들은 노트에 적혀 쌓여갔지만, 시인이 될 수 있을까라는 불안은 “다음 생에는 시인의 아내로 태어나고 싶다”라는 생각으로까지 번진다.
현실은 그런 그녀를 반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이 남편에게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녀는 자신의 여동생과 그녀의 두 딸을 집으로 무작정 데려온다. 공부도 곧 잘하며, 성취욕도 강했던 여동생은 양육을 위해서 다시 일을 하게 된다. 주인공은 두 딸을 책임지며 육아를 하게 된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입학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 둘을 키우는 것은 필사적으로 하루를 견뎌내는 것이었다. 견뎌낸 하루는 다시 또 견뎌야 할 하루만을 남겨두고 그녀를 잔인하게 피곤으로 몰아넣었다.
20평 초반에 볕이 잘 들지 않아 눅눅한 공기가 가득한 빌라 1층에서 그녀는 엄마, 아빠, 여동생, 그리고 두 아이와 함께 살았다. 엄마는 사회생활을 못하는 그녀에게 집안 일과 육아를 오롯이 떠맡도록 종용한다. 동생은 실패한 결혼과 고달픈 사회생활에 엄마라는 역할을 회피한다. 그 속에서 그녀는 점점 지쳐간다. 체력적인 것보다 겨우 찾은 ‘시’라는 세계에서 추방당한 것 같은 아픔이다.
다시, 떠나야 할 시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에 그녀는 나는 누구인지 묻게 된다. 묵묵히 지켜만 보던 아버지가 세상을 뜨기 전에 툭 던지고 간 말 ‘절대 너를 잃지 마라’라는 말이 주인공 머릿속에 계속 맴돈다. 결국, 남은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을 떠나 작은 원룸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필사를 시작하고 향긋한 커피 향과 항상 곁에 머물던 일상에서 새로운 세상을 건져 올려 시로 쓴다.
그녀는 시를 쓰며 여행할 것이다. 등단이라는 목적지가 아니라 새롭고 다양한 정류장에 잠시 머물다가 다시 떠날 것이다. 나는 그 안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과 사물과 사건들이 앞으로 그녀의 삶을 새로운 기쁨으로 가득 채울 것처럼 느껴져 기뻤다.
지금, 우리 스스로에게도 물어볼 차례다. 영원한 것은 없다. 지금 머문 이곳은 정류장일 뿐이다. 그리고 언제 다시 떠날 시간이 오면, 아주 갑자기 사소하게 아무것도 아닌 계기로 떠나게 되면 그때 기쁜 맘으로 살 용기를 가져보자.
아무도 보지 않지만 부지런히 쌓이는
나만의 필사 노트는 무엇일까.
©️keyp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