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지금 감은 두 눈이 다시는 떠지지 않기를

지독한 위로

by 랩기표 labkypy

지금 감은 두 눈이
다시는 떠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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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훈





어둡고 습하지만 유쾌한 위로였다. 22살의 유능한 어린 친구는 당연한 것들의 결핍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연한 것들이라. 무엇이 당연한 것일까. 세상에 당연하고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이 있을까. 존재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 각각의 인생에 덕지덕지 붙는 책의 주석 같은 부연 설명은 그저 누군가의 생각을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데 더 의의가 있다. 우리는 그 틈바구니 속에 특정한 유형의 인간으로 예속되어 활용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끔 그것을 통해 위안을 삼으니 참 재밌다. 도윤에게 이러한 세상은 구차하고 불합리적이었다. 사람들은 광대놀음에 현혹되어 정말 중요한 것을 뒤로 밀어버렸다. 도윤은 그것을 결핍이라고 불렀다. 그 결핍에 도윤은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었다.

도윤은 슬펐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고 시기와 질투에 화도 많이 낸다. 사랑을 주고받는 것은 어색하다. 특히 그를 몹시 사랑하고 아끼는 부모의 사랑은 역겹다고 생각한다. 우울증으로 정신치료를 받는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사랑은 너무 크고 넘쳐서 오히려 그는 부담스러워한다. 감당하기 힘들어 그는 스스로 도망치는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화를 내는 것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는 것 같았다. 웃음은 스며들지만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도윤은 부모에게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기고 잊혀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리광 같았다. 성인의 어리광은 울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으로 치닫기 때문에 불안하고 슬프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이 슬픔은 대학생 도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풀어있었다.






단절

문학을 전공하는 그였지만 일상에서는 창작 욕구를 엿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주변 세상과 함께 사라지고 싶어 했다. 어른들이 만든 세상. 부작위로 점철된 세상은 그에게 마땅히 망치로 부서져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형용사가 붙은 모든 것을 부정했다. 일반적이고 평범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의미로 특별하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특별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 데 묶어 자기 멋대로 편하게 평가하고 해석하는 것을 도윤은 싫어한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디는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그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 정신병원 의사, 술집 사장, 학교 친구 등 그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게 되면 견디지 못한다. 그에게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지워지는’ 선을 넘는 행위다.

그렇게 그는 사람들과 멀어졌다. 조금 의아한 건 도윤이 일본에서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다. 그가 일본 특유의 친절에 몸서리 치면서도 검정고시를 거쳐 일본에 정착한 것은 아이러니했다. 어쩌면 그는 더 큰 미움과 역정이 필요했기에 친절과 더욱 가까워질 필요가 있었나 보다.


위로

계속될 것 같은 영광도, 꺾이지 않은 청춘도 모두 끝이 있는 것이 삶의 숙명이자 재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도윤의 아픔도 어둠만으로 가득 찬 동굴 같았지만 끝이 있는 터널이었다. 그 터널 끝으로 안내한 것은 유치하지만 아름답게도 사랑이었다. 안정제에 의존하며 환각으로 위로받던 그는 사랑을 시작한다. 우연히 학교에서 만난 나츠코에게 푹 빠진다. 삭막한 그의 가슴에 이토록 진한 핑크빛 감정이 숨어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랑 앞에 바보 같아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불행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다가서기 머뭇거린다. 그 불안은 상큼한 바람결에 흩날리는 벚꽃의 짧은 생처럼 그녀의 고백으로 순식간에 훅 사라져 버린다. 안타깝게도 그는 삐뚤어진 영혼을 사랑 앞에 무릎 꿇릴만큼 강하지 않았다. 우울과 고통. 괴로움과 절규 속에서 관계는 엉망이 되어갔지만 그로 인해 더욱 진실한 마음을 터 놓는 계기가 된 것을 보며 ‘신은 장난꾸러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츠코는 눈물로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고 그로 인해 도윤도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낸다. 그렇게 발가벗은 두 영혼은 새벽까지 움켜 안은 채 사랑이라는 이름의 위로를 주고받는다. 그의 말대로 ‘자신은 강물에 흘러가던 사람이었고, 그녀는 거슬러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녀의 배에 함께 올라타기로 했고 서로가 지켜주자는 그녀의 말에 다시 눈물로 화답한다.

벚나무가 만개했다가 아쉬움으로 작별을 고하던 늦은 3월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그려져 잠시 책을 놓고 저려오는 가슴을 쓰다듬었다.


소통

소설은 도윤이 한 번도 안부를 묻지 않았던 엄마에게 “밥은 먹었어?”라는 인사를 하며 끝난다. 위로의 출발은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먼저 스스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 진심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도윤은 그런 사랑을 이미 한 번 경험했었다. 이번에 다시 찾아온 사랑은 그 전 보다 더욱 간절한 것일까. 알 수 없다. 삶은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도윤이 그의 환각 친구 ‘호미’가 다시 찾아올 때 억지로 막거나 도망치고 쭈그리고 앉아 있지 않고 손을 내미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면 그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도윤이라고 가칭한 작가의 진심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다. 어린 나이에 훌륭한 문장을 써낸 그의 재능에 감탄했다. 더불어 나도 어떤 용기와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참으로 씁쓸하고 지독한 위로였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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