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클락헨

인간 절멸의 순간

by 랩기표 labkypy

클락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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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야비







소설로 시작해 연극 시나리오로 이어지더니 갑자기 논문을 읽는 것 같다가 다시 소설이라는 것이 확실해지는 책이다.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글 틈에서 솟아오르는 아름다운 문장들이 마치 콘크리트에 핀 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장하는 음악과 그림을 찾아 듣고 보느라 읽는 속도는 더뎠지만, 고양된 가슴과 머리를 마주하는 순간은 즐겁고 유쾌했다. 의대 출신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는 글쓴이는 음악, 미술, 문학 그리고 의학에 해박했고, 그것들을 소설에 아주 잘 버무렸다. 이야기 구조가 다소 뻔한 것 같기도 했지만, 닭이라는 흔한 가축을 인간의 욕망과 절멸의 소재로 삼은 것은 놀라웠다.





문명은 인간의 이기에 따라 진화(?)해왔다. 편리와 편의를 얻기 위한 기술 또한 함께 발전했다. 지금은 기술이 수족을 대신하는 것을 넘어서 생각과 판단까지 대체하는 수준에 와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은 우리가 지배하고 활용해야 되는 무언가였고 인간은 지구의 역사 속에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변화와 파괴를 만들어낸 종이 되었다. 자연 파괴가 계속되자 참다못한 지구는 자신이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기 시작했다. 각종 바이러스 발생과 생태계 혼란 그리고 이상 기후 현상 등을 통해 우리는 이제야 뒤늦은 후회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성과 기술의 시대가 감성과 철학을 ‘밥 먹여주지 못하’는 것으로 치부하던 습관은 여전했고 이러한 감수성은 아직도 많은 곳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잃어버린 미래에 대한 보상을 하라’며 외치는 어린아이들의 함성은 강한 압력으로 압축해 멀리 새어나가지 못하게 했다. 책은 이러한 인간의 탐욕으로 발생된 괴질로 인한 인간의 절멸에 대한 이야기다.

어느 날 달걀에 산란 날짜가 새겨진다. 이것을 발견한 과학자들은 해당 종계’만’을 키우자 결심한다. 먹고, 입고, 싸우는 인간에게 유리한 종자만을 키우고 나머지는 살처분하는 과정인 ‘솎아내기’를 반복해서 하루에 12알을 낳는 닭을 만들어내기까지 성공한다. 생존과 번식 본능을 인간이 억제하여 닭을 선별하는 솎아내기 과정은 아주 잔인하고 처절하다. 생애 주기가 일주일 정도인 닭, 클락헨은 아주 빠르게 세대를 거듭하게 되고 그에 따라 형질 변화도 빨랐다. 결국 인간에 유리한 형질의 닭 클락헨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개체가 된다. 전 세계 사람들은 이러한 새로운 닭의 출현을 기존의 닭을 살처분하여 클락헨 먹이로 쓰면서 열광했다.

주인공은 이 모든 개발에 처음부터 참여하는 여 과학자다. 어릴 적에 생식기능을 잃어버린 그녀는 연구소 주변 저택에 살고 있는 성악가 출신의 피터와 사랑에 빠진다. 그 두 커플과 연구소장인 리처드 그리고 그의 와이프이자 홍보실장인 앤이 함께 겪는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이들의 단란하고 아름답고 로맨틱한 생활 속에서 클락헨은 인간의 계획대로 탄생한다. 클락헨의 탄생으로 더욱 풍요로워질 것 같던 삶은 클락헨을 먹은 모든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피를 토하며 죽는 괴질로 무너진다. 그리고 온통 클락헨만 남은 세상에 생식기능을 잃은 주인공만 이유는 모른 채 홀로 살아남는다.

주인공이 ‘나는 끝이 있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로댕의 작품 지옥문 같은 방사선실 문을 열고 클락헨 속으로 뛰어들며 인간 종의 절멸을 막겠다는 다짐으로 소설은 끝난다.

놀라운 상상력과 특정 장르를 벗어나 다양한 세계가 중첩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읽는 재미가 더했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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