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eynote

가을이 되면

by 랩기표 labkypy


가을이 되면,


시제를 간다. 문중행사니 뭐니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시제란, 기억에도 없는 아버지와 13살 초등학교 졸업 전까지 나를 길러주신 조부모의 제사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른 적이 없다. 내가 말을 입에서 떼었을 때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 여러 이유로 나의 어린 시절은 결코 쉽게 기억되거나 간단히 적을 수 있는 추억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 나는 커서 아버지가 되었고, 어떠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다시 나는 어떠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저 옆에서 묵묵히 자기 할 일을 잘하는,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며 꿈꾸는 자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싶다는 작은 소망만이 있다.


아이가 클수록 나는 작아지는 것이 육아다. 하지만 내가 작아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의 뿌리가 단단히 땅에 박혀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오면,


이런 생각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올해는 읽을수록 허점 투성인 부끄러운 나의 글처럼 나는 아직도 어리석고 빈틈이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딘가 숨고 싶다. 하지만 아주 넉살 좋게 지우지도 않고 그대로 남겨두는 것 또한 우습다.


그렇게 가을이 되면, 오면, 또 이렇게 가고 나면 나는 아스라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으스러지듯 아픈 영혼 같은 겨울을 붙잡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고 또 영화를 보면서 쓸데없이 글을 끄적거리며 마른하늘에 떠있는 달처럼 누군가 바라봐주기를 원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거제도 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