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차라리 소수를 만족시키는 길을 택하라

전원경 <클림트>

by 랩기표 labkypy
클림트 <누다 베리타스>


천장화 스캔들이 있기 조금 전에 완성된 〈누다 베리타스〉에서 클림트는 기존의 권위와 체제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다시 한 번 표명한다....긴 머리를 늘어뜨린 나체의 여인이 냉정한 표정으로 똑바로 선 채 거울을 들고 있다. 약간 벌어진 입술, 피 흘리는 상처 같은 뺨의 홍조, 투명한 눈동자 등으로 인해 이 벌거벗은 여성은 보는 이들에게 섬뜩한 느낌을 준다. 그녀의 발치에는 검은 뱀 하나가 막 똬리를 틀며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누다 베리타스’, 즉 ‘벌거벗은 진실’이라는 그림 제목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고 여인의 머리 위로는 “모든 이를 즐겁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소수를 만족시키는 길을 택하라”는 프리드리히 실러Friedrich Schiller의 시구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이 도드라진 문장은 보수적인 빈 사회에 던지는 클림트의 선전포고처럼 들린다.

〈누다 베리타스〉의 인상은 차라리 위협적이다. 클림트는 여성의 관능이 때로는 상대를 제압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싶다. 그것은 30대인 클림트가 남성으로서 깨달은 성의 위력이기도 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Die Traumdeutung』이 발표되며 술렁거리던 빈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클림트는 인간의 깊은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본능, 즉 성의 위력과 공격성을 자신의 그림에서 본격적으로 끄집어내기로 결심했다. 〈누다 베리타스〉는 그처럼 숨어 있는 진실을 밖으로 꺼내어 놓겠다는 선언이었다. 실제로 이 작품을 계기로 클림트의 스타일은 완전히 달라졌다. 여인의 몸에는 별다른 굴곡이 없고 그림은 면이 아니라 선으로만 그려졌다. 이 그림은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클림트의 스타일에 대한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다.

- <클래식 클라우드 003 클림트 X 전원경 >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며 일반적인 공식으로 30대에 성공을 했던 클림트는 동료이자 친동생이었던 에른스트의 죽음 이후 3~4년 뒤에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다시 등장합니다. 19세기 말 빈은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왕정 체제를 유지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중심이었습니다. 빈을 대표하던 인물 클림트는 자신에게 영광을 주었던 허울을 벗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이를 즐겁게 하지 못하면 소수를 만족시켜라’는 문구가 새겨진 그림에서 그의 신념이 읽히는 것 같습니다. 덧붙여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은 ‘자기 자신에 충실한 삶이 진정한 예술이다’가 아니었을까요.

그가 만약 성공을 하지 못한 굶주린 작가였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문득 고흐의 불행했던 삶이 떠올랐습니다. 클림트와 달리 조명받지 못한 채 가난과 치열하게 싸우며 자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한 고흐.

다르지만 닮은 듯한 이 두 예술가를 떠올리며 위대함은 언제나 시대를 뛰어넘은 용기와 대담함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아주 흔한 말이 되새겨집니다. 위대한 예술가에게 주어진 것은 누군가의 의지이자 속박이며 그것을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삶의 가치를 가져다준다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이 같은 정신은 스스로 히피이자 예술가로 생각했던 스티브 잡스의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멍청하다고 생각이 들면 스스로 만들어라’ 식의 정신과 닮았다는 점에서 신기하기도 합니다.

예술가의 성공에 현실적인 잣대를 두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가 부끄럽습니다. 또한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그들의 필연적인 숙명에 엄숙해지기도 합니다.

클림트와 같이 지금 현재 물질적인 성공과 대중의 호응을 받고 있다면 다시,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해볼 때가 아닐까요.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예술은 유한한 우리에게 불멸의 환상을 심어주기에 더욱 가치 있습니다. 수천 년 동안 반복되는 질문들. 우리는 유한하지만 이 영원한 물음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술이 좋습니다.



©️keyp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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