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부귀영화 13화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다

[영화] 헌트

by 랩기표 labkypy

헌트

크레이그 조벨









영화는 잔인하다. 영화 제목인 ‘사냥’의 대상은 사람이다.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설정이기에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장면들이 많다. 여 주인공이 화려한 액션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빌>이 떠오른다. 하지만 <킬빌>이 복수극 구조로 다양한 고전 영화의 오마주를 ‘보는’ 재미에 특화되어 있다면 이 영화 <헌트>는 잔인하고 화려한 볼거리 뒤에 드러나는 ‘메시지’가 흥미롭다.

사냥꾼들이 스노볼이라고 별칭을 붙인 주인공은 자신을 납치해 인간 사냥터에 가둔 사람들을 찾아낸다. 그리고 왜 그들이 잡혀와 죽임을 당했는지 밝혀낸다. 그리고 스노볼이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에서 따온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사회주의 혁명 뒤에 나타난 스탈린 독재를 비판한 풍자우화 소설이 자본주의 정점에 있는 등장인물의 입에서 흘러나오면서 묘한 질문을 던지고 끝난다.




기술개발과 자본주의

냉전시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팽배한 긴장관계를 이어간다. 두 이념의 대립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지만 체제의 정당성은 ‘잘 먹고 잘 사는 것’보다 힘의 논리에 치우쳐져 있었다. 두 진영은 군사력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기술개발에 적극 투자했다. 이후 기술 진화는 산업과 경제 전반에 영향을 끼쳤고 전쟁이 사라진 시대에 유연한 사회제도였던 민주주의 체제가 경제력으로 우위에 올라서게 된다. 공산주의 국가의 실패는 그 기본 철학과 달리 독재와 빈부차로 사회구조가 경직되면서 고립과 부패를 유발했다는 측면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후 민주주의는 ‘자유’ 로운 경쟁 속에 무한성장해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유로운 경쟁은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변질되었고 기울어진 운동장은 어느새 수직으로 세워져 계층 간의 격차는 극복할 수 없도록 벌어지며 서로 교류도 왕래도 없어진 분열된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이 현상은 실패한 이념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독재와 부패 그리고 극심한 빈부차와 닮았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에서도 ‘사냥’을 계획하는 사람들은 IT 업계 젊은 CEO 같은 새로운 권력층이다. 그들이 농담 삼아 ‘인간사냥’에 대해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았고 해킹으로 그것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CEO 자리를 박탈당하는 등 사회적 수모를 당한다. 그들은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피해를 입었다는 분노로 ‘인간 사냥’을 시작한다.


공감이 부족한 시대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사냥감이 된 사람들은 ‘사냥꾼’들을 소셜 미디어에서 비판한 12명의 사람들이다. 자본시장체제를 비판하거나 사회주의 사상을 지지하는 반체제 운동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들 중 발음은 같지만 알파벳 철자 하나가 다른 이름을 가진 ‘스노볼’이라고 불리는 주인공은 그 대상이 아니었다. 그녀는 특수부대 출신에 전역 후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냥꾼들의 착오로 사냥터에 끌려온 그녀는 끝까지 살아남는 것도 모자라 부자 사냥꾼 들을 다 죽인다. 그리고 사냥꾼 무리 중 우두머리인 아테나는 사냥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수가 있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는다.

“제발 내가 제대로 납치해온 것이라고 하자”


라는 말과 아테나는 함께 스노볼과의 치열한 결투 끝에 죽는다.

또한 그 마지막 장면에서 스노볼이 “스노볼은 이상주의 돼지잖아”라고 묻자 아테나는 그녀가 그 소설을 읽었다는 것에 놀란다. 자신과 다른 ‘부류’라고 생각했던 그녀와 공통점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절대 틀릴 일이 없다는 오만을 담은 장면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대부분 같은 것을 보고 배우지만 어느 순간 배경에 따라 경험과 배움의 격차는 커진다.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지고 그들이 하는 것은 그들만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게 된다. 심지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다양하게 패러디된 소설마저 말이다.

고립은 개인뿐만 아니라 조직 또는 계층에서도 발생한다. 고립은 단절로 이어진다. 존재하는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는 자연스럽지 않다. 결국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망가지게 된다.





마지막 혁명은 없다

조지 오웰 에세이 <자유와 행복>에서는 자미아친 소설 <우리들>을 다룬다.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자유를 뺏는 사회를 다룬 내용이다. 아래 내용은 그곳에 등장하는 대화 일부이다.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게 혁명이라는 걸 아십니까?”

“물론 혁명이죠. 그래서 안 될 이유가 있나요?”

“혁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었어요. 그러니까 또 혁명이 있을 순 없어요.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세상에, 당신은 수학자 아니던가요? 마지막 숫자가 뭐죠? 말해 보세요.”

“마지막 숫자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그럼 제일 큰 숫자라고 해요. 제일 큰 숫자는 뭐예요?”

“말도 안 돼요. 숫자는 무한입니다. 마지막 숫자란 건 있을 수 없어요.”

“그럼 마지막 혁명이란 말은 왜 하세요?”

영원한 승자는 없듯이 불변의 진리도 없다. 종종 우리는 비상식이 상식이 되어가는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반대로 터부시 되어 왔던 것들이 한낱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마주하기도 한다. 어떤 식으로든 사회는 변화하고 있고 그 변화를 막는 것은 새로운 혁명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헌트>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사냥이라는 알레고리는 지금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되는 질문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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