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부귀영화 08화

불편한 진실...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화이트 타이거

by 랩기표 labkypy

넓은 세상을 보고 온 야쇽은 자신의 조국인 인도가 후졌고, 자신이 좀 더 근사하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정당한 방법으로, 사회구조를 혁신하는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꿈꾸게 하는 여유와 가능성은 불합리하고 구태의연한 아버지로부터 나온 자본과 네트워크로부터 비롯되었다.


좋은 차에 기사를 대동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기사를 천하게 대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화를 내는 정도가 야속의 한계였다. 인도에서 야속과 같은 유학파 출신의 새로운 계층을 일컬어 NRI(Non Resident Indian)이라고 부른다. 이들에게 조국은 구제해야 되는 대상이지만 대부분 현실의 높은 벽과 기득권의 달콤함에 결국 기존 체제에 순응한다.


야속 또한 뉴욕에서 만난 그의 아내와 이상을 꿈꾸며 그들만의 방식으로 사업을 일구려 한다. 하지만 집안의 반대와 인도의 구조적인 부조리에 결국 순응하고 만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마음 깊숙한 곳에 기득권을 놓지 못한 욕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민사상으로 물든 엘리트 계층의 배신은 겨우 쌓아 올린 작은 희망들을 무너뜨림으로써 더 큰 상처를 가져온다. 야속의 운전기사 발람은 그것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더욱 절망에 빠진다.


야속의 생일날, 그의 아내가 만취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전을 하다가 길을 건너는 아이를 치여 죽이는 사고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 죄는 결국 발람에게 돌아간다. 사건 이후 발람은 어느 날 갑자기 아쇽의 아버지에게 불려 들어간다. 으리으리한 거실에 들어가 늘 하던 대로 쭈그려 앉아 주인의 발에 입을 맞추려고 하자 아쇽의 아버지는 “우리는 가족”이라며 친근하게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손짓한다. 이어서 발람은 자신이 아이를 죽였다는 자백을 강요당한다. “판사와 이야기는 다 되었다”라고 말하는 변호사의 말에 아쇽은 눈가가 붉어진 상태로 “이건 잘못된 일이다”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이후 발람은 운전기사가 되는 것, 주인을 모시는 것이 자신이 업이자 운명이라는 믿음을 버린다. 어릴 적 자신의 영민함에 학교 선생님이 “너는 백 년에 한 번쯤 나오는 화이트 타이거다”라고 칭찬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미래를 준비한다. 그 준비 방식은 공정하거나 정당하지 않다. 주인을 속여 비용을 청구하여 몰래 돈을 빼돌리거나 주인이 잠든 시간에 주인 차로 택시 영업을 한다. 그렇게 돈을 모으던 어느 날, 아쇽의 아내는 죄책감을 참지 못하고 홀로 미국으로 돌아가고, 그녀를 공항까지 바래다준 발람은 인생의 전환점을 찾겠다고 다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야 된다


영화는 여느 다른 인도영화처럼 유쾌하지 않다. 명확한 기승전결 형식을 취하지도 않고, 권선징악의 구조 또한 아닐 뿐더러 으레 나오는 인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도 없다.


발람은 부정한 방법으로 부정한 관습과 굴레를 깨뜨린다. 야속을 죽이고 그가 뇌물로 준비한 돈을 훔쳐 달아난다. 그 자본을 밑천 삼아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과자를 굽는’ 신분을 벗어나 택시 사업가로 결국 크게 성공한다. 그의 사업에는 ‘가족 같은 동료’도 없으며 ‘주인과 노예’도 없다. 오로지 사용자와 근로자 간의 계약이 있으며, 사업상 발생하는 문제를 책임지는 리더십이 강한 경영자가 있을 뿐이다.


인간이 일궈낸 대부분의 진보의 역사는 피와 전쟁으로 얼룩져 있다. 원주민을 몰아내 땅을 개척하고, 식민지배로 각종 자원과 유물을 훔쳐왔다. 사람을 족쇄로 묶고 그들의 노동으로 땅을 일구었고,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아이들의 희생으로 공장은 굴러갔다.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고상한 모습 이면에는 이러한 야만이 숨어 있다. 지금 화려하게 시장경제에 새로운 주인공으로 등장한 인도의 뒷면에도 이러한 모습이 현존한다. 인도 출신 방송인 ‘럭키’는 이 영화를 평하면서 실제 인도는 이처럼 명암이 극명하게 나뉜다고 말했다.


부자들 곁에서 그들의 성공방식을 익히고 그것을 이용해 성공한 발람. 우리는 그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영화는 그를 통해 정의는 무엇이며 선과 악은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가 묻고 있다. 그 물음에 뚜렷하게 답을 할 수 없는 우리는 난감해진다. 영화는 이런 불편을 주지만, 우리 삶이 이처럼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어쩌면 이렇게라도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다짐이라도 하듯 영화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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