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나오는 길에 아레카야자를 팔고 있는 젊은 부부를 보았다. 2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차려진 문과 벽이 없는 꽃집 앞은 구경하는 사람과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한 데 엉켜 붙어 어지러웠다. 나도 그중 하나로 줄곧 아레카야자를 약 5여분을 바라보고 섰다. 남편의 가격을 흥정하는 소리와 고맙다는 인사가 이어졌다. 나는 큰 결심이라도 한 듯 저것이 얼마냐고 물었고, 3만 5천 원’만’ 달라는 특유의 설득력이 담긴 대답을 들었다. 나는 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들었으나, 두 손 가득 주렁주렁 달린 짐들을 들고 집까지 걸어가야 하는 현실을 인지하고 그만 생각을 접었다.
슬리퍼를 신고, 파카를 입은 아내는 바쁘게 영업을 하고 있는 남편을 바라보며 조용했다. 날 때부터 정해진 업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에게 꽃집은 화사한 꽃과 그것을 담고 있는 쭈글한 플라스틱 화분의 조화만큼 이질적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잠이 들기 전에 어릴 적 꿈꿨던 근사한 모습과 동떨어져서 몇천 원 되는 식물을 팔아먹고살아야 하는 신세를 한탄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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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를 때가 많다. 돌아보면 지금의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아닌 것 같다. 취사선택이 누락된 것 같은 인생은 충분히 시간이 흘러버려 이미 김이 빠진 상태다. 다시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후회와 미련의 행렬. 고작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도 보지 않는 글을 끄적거리거나 맘에 들지 않는 음악을 만드는 것뿐. 그러나 젊은 사장이 낯설고 불편해 보이는 아내 앞에서 두고 보란 듯이 불을 뿜어 내는 모습에서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멋있었다.
다음에 마트를 들렀을 때 그들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보이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이 조금 더 꿈꾸던 일과 가까워졌으며 좋겠다. 그리고 정성스럽게 돌본 식물들이 팔려 나가는 보람이 동일하게 적용되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일을 마치고 마당 한구석에 화초를 옮기고, 온실 속에 꽃을 넣을 때 출발하기 전보다 훨씬 휑하니 비워진 자리를 보게 되면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날 것이다. 충만한 하루 끝에 맛보는 감정은 우리 모두가 원하는 행복의 본질이다.
돌아가는 길. 집에 있는 아레카야자가 떠올랐다. 언제쯤 저만큼 클까. 성장을 멈춘 것은 아닐까.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