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461개의 도시락
아이스크림 그만 먹어
싫어요
순 설탕 덩어리인데 왜 그걸 먹어
맛있으니까요
그럼, 여기 와서 과일 먹자
배 먹을래 사과 먹을래
사과!
맛있지?
네
그럼, 아이스크림은 이제 먹지 말자
싫어요
*
할머니와 손자의 대화를 듣다 보니, 집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따스한 말과 손길. 몸에 좋지 않은 건 끊어 내고, 몸에 좋은 것만 주려고 하는 어미의 노력이 끈질기게 펼쳐지는 곳. 이곳에서 나는 편안히 소파에 누워 세대를 뛰어넘는 대화를 들으며 볕을 쬐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들어선 질문 하나. 나에게 집은 무엇일까.
집은 항상 어딘가 불편했다. 집은 쉼표, 물음표가 아니라 마침표와 느낌표였다. 명령문이 가득한 집안에서 나의 행동은 타인의 손에 결정되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영원히 타자일 수밖에 없는 서로는 그 세계를 함부로 침범하는 사람에게 비난을 부을 수밖에 없게 된다. 누구’의’ 소유물로 여겨지는 아이들에게 자유는 사치였다. 인격은 만들어지는 것이고, 정체성은 부여받는 것이었으며, 꿈은 정해지는 것이었던 시대.
나는 일탈을 원했지만, 용기부족이었다. 나는 반항하고 싶었지만, 약했다. 순종적이었지만,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화는 춤, 음악, 책으로 향했다. 집에서 나는 완벽할 수가 없었다. 집 밖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 싶었다.
후에 아이가 생기자 집은 돌아오고 싶은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밖에서 입은 상처를 안에서 치유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바깥공기가 들어와 안 공기를 밀어내며 환기가 되듯이 지친 몸과 영혼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 안의 것들은 모두 밀어내고 밖으로 내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그런 집을 가진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 사무치는 그리움의 대상이 무엇인지 항상 궁금했는데, 생각해보니 바로 집이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짓기로 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목재를 잘라 붙이고, 콘크리트를 부어 형태를 만드는 것을 넘어 그 안의 공기를 차분하고 편안한 향으로 채우고, 단순하고 반복적인 친근함이 지속되게 하는 행위다.
‘짓다’라는 동사는 ‘시를 짓다’와 ‘집을 짓다’에서 같이 쓰인다. 정성을 들여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의미다. ‘성공하다-짓다’의 관계는 짙다.
불행한 삶 앞에서 인상을 지으면 더욱 불행해지고, 미소를 지으면 더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서는 미소를 짓는 것이 좋다. 어느 순간 무엇 때문에 화가 나고 슬플지라도 울어도 다시 웃고, 화를 내어도 다시 웃으면 좋다. 그렇게 미소로 지어진 집은 다시 돌아가고 싶은 곳이 된다.
카네시게 아츠시의 영화 <461개의 도시락>에서 뮤지션 아빠는 1년 재수해 고등학생이 된 아들에게 3년 동안 도시락을 싸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빠는 약속을 지켰다. 아들은 부모의 이혼, 입시의 부담감 등으로 방황했지만, 아빠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매일 아침마다 주방에 불을 올리고 부산하게 도시락을 준비했다. 최상의 맛과 비주얼로 꽉꽉 채워 461개 도시락을 쌌다.
처음에 아들은 도시락이 단순히 아빠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은 그냥 아빠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도시락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누군가의 기분을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후 도시락으로 친구가 생기고 사랑을 하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다.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위하면 그 사람의 자존감을 높이고 상처를 치유한다.
461개의 도시락을 싸는 동안 벌어지는 수많은 오해와 다툼 그리고 불안과 방황은 모두 도시락을 싸고 나가는 집에서 치유된다. 재촉하지 않는 격려는 미소로 곳곳에 포진해 서로를 끌어 안았다.
네가 어디서 무엇 때문에 힘들지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묵묵히 도시락을 싸고, 미소를 지어주는 집이 있다면 성공한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어제는 저녁으로 연어구이와 미역국을 끓였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