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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Jun 26. 2022

폭력으로 치우친 극과 극의 소통 방법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


팔에 용 문신을 한 소녀가 있다. 가녀린 몸에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는 그녀는 본인에게 쏟아지는 고난과 역경을 용 문신을 보며 이겨낸다. 나는 강하다.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주문을 외운다.


보통 강함을 드러내는 자들은 약하기 때문이다. 발톱을 드러내고 상처를 내 주변 세계를 밀어내는 것은 자신의 세계가 침범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모든 관계를 적으로 간주하고 존대와 존중 없는 시간이 흘러간다. 주변에 쉽게 볼 수 없는 유형의 사람이기에 보는 사람은 불편해진다. 허점투성이인 아버지에게는 더욱 차갑다. 자식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무능력에 대한 일종의 죗값을 묻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혜영은 욕설과 폭력을 발산하다가 나이 차가 많은 남동생에 도달하면 한없이 따스한 마음으로 수렴한다. 더 강해져야만 하는 이유다.


사건은 자신과 동생의 유일한 안식처인 이층 중국집 식당에서 쫓겨 나면서 벌어진다. 혜영의 아버지가 지역 유지에게 싸게 빌린 땅에 차린 중국집 매출이 좋자, 땅 주인이 구두로 약속했던 무기한 토지 사용을 취소해버린 것이다. "임대기간 걱정하지 마시고, 열심히 장사해서 부자되세요." 그러다 부자가 될만하니, "계약기간이 끝났으니 권리금 없이 이제 그만 나가주세요."라는 흔한 갑질이다.


이로써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지역 유지와 가진 것 없는 용 문신을 한 소녀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자본주의에서 합법적이고 마땅한 수준의 갑질은 보통의 을에게 쉽게 허용될 것이다. 영화에서도 혜영의 이모 가족을 비롯해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라고 종용한다. 무조건 지는 게임이니 그만두고 물러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러나 혜영은 보통과 달랐다. 지역 유지의 보통의 갑질이 있었다면 사회가 길들이지 못한 무모함이 있었다. 영화는 <불도저를 탄 소녀>라는 제목처럼 혜영이 불도저를 타고 지역 유지의 집을 부순다. 소통되지 않는 극과 극의 만남은 결국 폭력이 난무하는 사태로 이어진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있다. 기존 법과 규칙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늘어나고 있다. 사다리가 끊어진 곳에서 능력과 성공이라는 함수로써 모든 문제를 풀어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영화는 사회 테두리에서 벗어난 주인공 혜영의 눈을 통해 그동안 체제가 허락한 욕망의 그림자를 비춘다. 그러나 강자가 약자에게 행하는 모든 것들은 합법적이기에 개인의 무능력함이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해석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의 모습을 보고 분노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시간이 갈 수록 중간이 희석되고, 극과 극으로 치닿고 있다. 진영의 대립이 소통이 불가능해지고 결국 불도저로 밀어버리겠다는 식의 대안을 찾을지도 모른다.


생각지도 못한 것들의 집합은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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