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ypyo Dec 01. 2022

만들어진 기적이 필요하나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원더

‘더 원더’. 의문인지 알았는데, 기적이었다. 불행의 늪에서 허우적 거릴때 우리는 기적을 원한다. 기적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과 같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대기근 시대. 영국의 수탈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고, 그나마 남아있던 감자마저 병들어 버린 시대. 길거리에 굶어죽는 사람들이 넘쳐났던 그 시대를 지나 10년 뒤 어느 흉흉해진 마을. 오로지 절망 밖에 없을 것 같은 곳에 기적이 일어났다. 먹지 않고 살아가는 소녀. 오로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다’라는 것을 먹고 산다는 소녀. 하루 33번 기도문을 외우며 오로지 하나님의 품에 안긴 성녀가 나타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기적이라고 부른다. 이 짙은 어둠이 모두 걷히고 밝은 날이 올 것이라는 계시로 여겼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부모는 왜 그녀를 성녀로 만들었을까. 자신을 비롯해 모두를 속이고 왜 딸을 성녀로 만들었을까. 소녀는 왜 부모의 바람대로 굶주림을 버티면서 죽기 직전까지 갈 수밖에 없었을까.


소녀의 오빠는 그녀를 강간했고, 오누이 간의 사랑은 곱절로 크다며 가스라이팅을 했다. 그리고 오빠는 그 행위로 인해 성병에 걸려 죽는다. 자신의 딸이 오빠를 잡아 먹었다고 생각한 소녀의 엄마는 그녀의 영혼을 먼저 잡아 죽였다. 소녀는 사랑했던 자신의 오빠가 본인 때문에 지옥불에서 붙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 거룩한 행위가 그를 구해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누구하나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주인공의 대처였다. 주인공은 소녀가 정말로 먹지 않고 사는 것인지 관찰 업무를 맡게 된다. 그녀는 간호사였기에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소녀가 기력을 잃어 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곧 ‘만다’라는 것이 엄마가 키스를 할 때 입으로 넣어주는 씹은 음식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러나 해답은 상식과 이성에 있지 않았다. 그녀는 소녀를 살리기 위해서 소녀의 부모, 자신을 고용한 마을 위원회를 설득해보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들은 이미 소녀의 희생을 염두해 두고 지금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만들어진 기적’을 가지고 싶어했다.


결국 소녀가 다시 살 수 있었던 것은 과거의 죄를 씻고 다시 태어났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 순간부터였다. 주인공은 소녀가 믿고 있었던 환생으로 설득했다. 상처를 낫게 해준다는 강 옆에 누워, 자, 이제 눈을 감아. 이제부터 너는 그 전의 사람이 아니라 낸시로 다시 태어나는 거야. 이제 과거는 모두 사라지는 거야. 그렇게 비로소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다.


우리도 종종 믿지 못할 사건을 마주한다. 상식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도 많다. 그 앞에서 우리 스스로가 이성적 판단과 윤리적 잣대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를 가지는 유일한 생물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따르며 삶을 꾸려간다. 감정 문제를 이성으로만 풀려고 하면 꼬일 뿐이다. 이성적 판단으로 해결책을 찾았다면, 그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은 감정이다. 설득은 여기서 출발한다. 교감과 공감이라는 감정은 이성 세계의 안내자이다. 대화나 설득이 필요한 경우, 상대방이 믿고 있는 지점부터 시작해야 된다. 불교 신자에게 교회에 나오게 설득한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아무리 떠들어봤자 먹히지 않는다. 차라리 사랑은 이곳에도 있으니, 절과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 번 살펴봐달라는 제안이 더 나을 수도 있다.


더 원더는 지나친 믿음이 우리를 눈 멀게 할 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영화다. 누구나 소녀와 그의 부모와 마을 위원회처럼 특별한 환경에서 그릇된 믿음에 빠질 수 있다.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충격과 고통이 필요하다. 또한, 객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볼 수 있는 제3자의 개입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이처럼 삶의 진보는 잘못된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능력과 환경을 갖추는 것이다.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개방성. 더불어 단단하게 감싸고 있는 벽을 깨고 나가는 고통을 감당하는 용기. 이것이야 말로 삶을 올바르게 끌어가는 법이 아닐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하면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