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 공부를 결심한 이가 제일 먼저 손대는 게 책읽기다. 그러나 바로 이게 병통이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의 지적처럼 ’정신의 성숙과 생각의 복잡을 혼동하는 일‘이 생겨난다. 어떤 공부에서든 (좋은) 책읽기를 생략할 수 없지만, 책읽기는 언제나 반편의 진실을 보여줄 뿐이다. 내가 ’공부하라‘고 하면, 우선 그것은, 규칙적으로 달리기나 윗몸일으키기를 한닥거나, 걸어다니면서 일체 타인의 얼굴을 구경하지 않는다거나, 약속에 견결하라거나, 사린(四鄰)과 새 관계를 꾸며보라는 등등의 얘기다. 혹은 타인과 더불어 있는 곳에서는 핸드폰을 드러내지 않는다거나, 작고 허무한 일들에 극도의 정성을 들인다거나, 질투와 시기를 자근자근 밝아 죽인다거나, 자신의 말하기나 앉기 등을 개선한다거나, 애착이 아니라 정성어린 연극으로 사랑한다거나, 차분함과 비움을 얻어 화를 내지 않도록 애쓴다는 것 등등을 하라는 뜻이다. 우선은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머리통 속에 랑시레르나 장자 등을 쑤셔 넣어 지랄(知剌)을 떠는 게 아니고.
_적은 생활, 작은 찰학, 낮은 공부 / 김영민 작가(철학자/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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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 맞은 느낌이다. 나는 여태껏 헛똑똑이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음에도 어떤 변화를 꾀하지 않고 이렇게 멍하게 있다는 사실을 고수에게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빨개진다. 공부라는 것이 자신의 빛을 밝히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밝혀줄 대상이 있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것이 지식의 진정한 효용성일 것이다. 그러나 소위 지식인 또는 오피니언 리더라는 사람들이 대중 앞에 나서 길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더 깜깜한 어둠을 몰고 오는 경우가 더러 있다. 또는 그럴듯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선동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엉망인 경우가 대다수인 것이다.
작가가 이야기한 바로 짚어보겠는데, 공부는 몸을 건강하게 하고, 생활을 가지런히 하는 것부터 시작이라는 것이다. 책에서 작가는 공부하는 것은 제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라, 제 마음(생각)을 어떤 쟁해진 태도 속에 넣고 갈고 닦는 것이라고 했다. ‘태도’를 먼저 만든 다음에 그 안에 ‘지식’을 집어넣어 단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공부하는 것을 이 알 수 없는 우주 속에서, 알 수 있는 ‘생활’을 얻는 일이자, 제 생황을 증명하는 일이라고 했다. 어떤 사람이 되는 길은 오로지 지적 추구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 또는 철학에 따른 생활을 만들어가는 일상이 영글어갈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형태는 달라도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지 않다. 주어진 일에 성심을 다해 최선을 다하고, 선택한 일에 후회하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지는 자세야 말로 그 출발이 아닐까. 매일 자기 전에 근력 운동을 하고, 일어나서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고, 영화를 보고 글을 적어 영상을 만들어 공유하고, 정리정돈을 생활화하고, 근검절약해 필요치 않는 욕망을 부추기지 않으며 아이의 눈에 맞춰서 대화하고 함께 고민하는 생활 등등이 모두 하나의 공부이자 삶에 빛을 불어넣는 훈련일 것이다.
이후에서야 성인의 말을 받아들이고 곱씹을 수 있는 준비가 되는 것이다.
지랄, 지식의 흩날림. 얼마나 많은 지랄병이 난무하는가 보면 재밌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