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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Jun 07. 2023

어느 화가



해인사로 들어가는 길에 병풍처럼 우람하게 서있는 가야산은 절경이었다. 마치 아버지의 넓은 품안으로 들어가는 마냥 세상의 끝에서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떠받쳐주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들어간 가야산의 산세는 많은 여행객들이 드나들면서 아주 잘 닦여 있었다. 합천은 실로 아주 오랜만이었지만 그 전에 어떤 기억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처음이라고 할 만큼 어떠한 정보도 추억도 없는 곳이었다.


한국 대표 사찰인 해인사와 그 안에 팔만대장경이 있다는 것 정도가 우리 나라 대부분 사람들의 합천에 대한 사전 정보가 아닐까. 팔만대장경은 고려 시대에 몽고 침입을 불심으로 이겨내자는 의도였다.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의 뛰어난 목판 인쇄술을 증명한다는 가치로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열중이다. 반면에 환란을 종교의 힘으로 극복하기만을 바랬던 국가의 무능을 방증할 것이다. 어쨌든 기념비적인 의미를 품고 탄생한 대장경 테마파크는 아주 큰 공원처럼 꾸려진 부지에 세 개 동으로 구성된 곳이었다.


각 전시실마다 사료와 디지털을 이용한 재현 프로그램이 아주 볼만했다. 그런데, 전시실을 도는 와중에 가장 눈에 크게 들어온 것은 합천군 초정으로 무료로 가훈을 써준다는 어느 서양 화가였다.


화가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여든 정도 되어 보이는 어르신이었다. 그 화가는 화가들이 자주 쓰는 빨간 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눈은 총명하다기 보다는 지난한 과거를 헤쳐나와 잠시 숨을 돌리는 듯 초점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나도 글 하나 부탁드려볼까 하여 서 있었더니, 화가께서는 글을 쓰면서 이런저런 말을 노동요처럼 읊었다.


“저는 서양 화가입니다.”


“글을 쓰는 것도 서예가 아니라 글자를 그림으로써 그려내는 것입니다.”


“저는 유명 프랑스 어느 화단에 정식 등록된 사람입니다. 그것…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림 그리는 것보다 글 쓰는 게 더 힘듭니다. 하나라도 틀리면 조화가 엉망이 되어 더 신경이 쓰입니다.”


사람들은 멋지게 쓰여지는 가훈을 받아가면서도 그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도 화가는 개의치 않고 부탁받은 글을 쓰고는 본인 도장을 꾸욱 눌러 찍은 후 “마음에 드십니까“ 물으며 의뢰자에게 건넸다.


사람들은 소위 ‘가훈집’이라는, 집안의 가풍으로 삼으면 좋을 말들이 씌여진 책에서 가훈을 골라 화가에게 전달했다.


화가는 노구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주 열정적이고 오랫동안 글을 써내려갔다.


사람들의 줄은 길어졌고 나는 도통 가훈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고민만 했더니 순서가 자꾸 뒤로 밀려나갔다.  


경독(耕讀)이나 동그라미 하나 또는 나무를 그려달라고 해야겠다고 마음 먹고 줄을 섰다.


그랬더니 화가는 이제 그만 좀 쉬어야겠다며 자리에 앉았다. 이후 화가는 다시 노동요 같은 말들을 이어가며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냐는 둥 인적 사항을 물었다.


나는 굳이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책을 읽었다.


그리고 몇십 분…후 나는 결국 글은 받지 못한 채 자리를 떴다.


화가를 만났는데 그의 작품을 보지 못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로지 공허하게 떠 다니는 글자들만 그의 주변에 걸려 있었고, 그의 정체성은 그림이 아니라 낡은 껍질에 쌓인 그 프랑스 화단 소속 인증서로 증명되었다.


그의 삶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그가 대장경 테마파크에서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후에 스스로 증명해야만 내가 되는 사람이 될까 아니면 그럴 필요 없이 온전한 나로서 살게 될까.


그리고, 돌아선 등 뒤에서 화가의 말이 또 들렸다.


“가훈을 무료로 써줍니다…가 아니라 가훈을 선물해줍니다로 바꿔 달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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