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keynote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by 랩기표 labkypy


무기력과 분주함은 불안이라는 공통된 원인에서 비롯된다. 내가 무엇을 왜 하는지 모를 때, 무기력해진다. 더불어 이러한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서 내 앞에 놓인 일에 집중하느라 분주해진다.


때문에 삶이 일 때문에 바쁘다는 것은 내가 그 일을 하면서 진정한 나를 찾게 되거나 자족한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내 삶이 분명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텐데, 나는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더하여 묻게 되는 질문, 지금 내가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왜 하게 되는 것일까?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고, 즐겁기 위해서 취미 활동을 즐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경험을 쌓아 생각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며 사람을 만나거나 강연을 듣는다.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더 좋은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사회적 성공, 흔히 부와 명예를 얻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얻는 것은 자유인가.


현대 사회의 자유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최대 생산 최대 소비의 체제 안에서 욕망은 부추겨지고 그 덩치는 커져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갖지 못한 것에 목말라 하며 이 답답한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쇼생크 탈출하는 것처럼 자유라고 생각한다.


채워질 수 없는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강제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곧 수동적 객체가 된다. 신에게 복종하여 구원을 구하던 시대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시대로의 전환, 그리고 이제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찾는 대혼돈의 시대에 서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 일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곧 최대 소비자로서의 신분 상승을 꿈꾸는 일과 동일할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곧 진정한 나로서 존재해보지 않았던 시간의 폐단으로 인해 찾아오는 공허함일까.


나는 그리 되지 못했기에 감히 섣부르게 말할 수가 없다. 또한 자유가 좋다는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가 의문이 든다.


무엇으로부터 불편함을 느낀다면 어느 수준 이상으로 학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학습이 되었다는 것은 시대적 흐름과 요구에 부응하는 행동일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적당한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면 틀에 갇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 자체가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보이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일까.


이 물음에도 제대로 답할 능력은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추구해야 할 방향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결국 자유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 내가 틀릴 수 있는 자유. 다른 세계를 탐험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 모방한 수준이겠지만 그럼에도 취향을 가질 자유. 등등


여기서의 자유란 최대 소비자로서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비틀어 나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해볼 수 있는 용기를 의미한다. 그렇게 멍- 때리는 연습과 고요해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보고자 한다. 분주함에 좇기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며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진짜 알게 되는 기쁨과 충만함을 가져보려한다.


잘 되려나 모르겠지만,


***


“자기감정의 능력에 이르면 자기 것을 홀대하지 말아야 할 필요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엔 산업 전체가 사람들에게 속삭인다. 자기감정을 느끼기보다 체험과 감정 서비스에 공감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자기감정은 불확실하고 심지어 부정적일 때도 많다고 말이다. 자극으로 일깨운 연출된 감정에만 공감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보고 싶고 누군가와 같은 마음이 되며, 누군가를 그리고 믿을 수 있으며, 마음으로 슬프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자신의 정서적 능력을 잃고 만다.”



“창조적 응답의 과정에 있는 자신을 경험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패러독스는 이렇게 자신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잃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해 ‘나다’라고 느끼는 그 순간에 ‘나는 너다’라는 감정도 느끼게 된다. 나는 온 세상과 하나인 것이다.”


_<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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