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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Jul 25. 2023

결점 덕분에 즐겁습니다

[영화] 빛의 시네마

무기력한 삶을 살던 힐러리는 영국 남부 어느 해변가 앞에 근사하게 서있는 극장 매니져였다.


그녀는 사회 초년생 때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었고, 그 일이 적성에 맞는 거 같아서 정직원으로 전환했다.


사실은 그녀가 어떤 적성이나 정체성을 찾아 나서 노력하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접했던 현실에 적응하며 그럭저럭 살만하다고 생각이 든 것을 천직이라며 스스로 부추겼을 뿐이었다.


그저그런 평범한 일상이었지만, 가끔 힐러리는 아름다운 해변을 앞에 두고 있는 극장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삶을 꾸려가는 자신의 모습이 근사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 그녀는 사장에게 성추행을 당하게 된다.


처음에는 굴욕적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사장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며, 아내와는 그저 쇼윈도 부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대부분의 남성들과 다를 바 없는 구식 래퍼토리에 치를 떨었지만, 계속된 구애와 설득에 어느정도 수긍하게 된다.


마치 영화관에서 일을 하게 된 이유와 비슷하게 그녀는 자신 앞에 놓인 생을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어쩌면 이처럼 특별한 형태의 사랑이 본인의 운명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녀의 삶은 어느 한 곳이 찢어졌다가 다시 덕지덕지 붙여지며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흑인 남성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녀는 묘한 호기심과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의 매력에 점차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곧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온 몸과 맘을 뺏기게 된다.


그녀가 그와 단 둘이 옥상에서 크리스마스 밤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를 보다가 갑자기 그에게 키스를 한 것은 주체할 수 없는 내면의 압박 때문이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그 일로 그녀와 그는 더욱 가까워졌고 중년의 백인 여성과 흑인 이민자 2세 청년은 인정받기 힘든 사랑을 나누게 된다.


어딘가 어색하고 비현실적인 장면이 로맨틱하게 이어지지만 힐러리의 극한 감정 양 끝단에 매달린 줄이 출렁이면서 위태로운 상황이 발생한다.


사랑은 이별로 비참해지고, 차별은 폭력으로 이어져 사회를 갈라 놓으려 한다. 이미 이유를 잊어버린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을 벌린 후 사라졌고, 어긋난 욕망이 성공의 문턱 앞에선 자를 끌어내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러나, 힐러리와 동료들은 서로가 너무나 달랐지만 함께 힘을 모아 따뜻한 공동체를 일궈나갔고 그 모습에 일종의 안도감이 든다.


어둠을 뚫고 나아가는 한줄기 빛이 스크린에 부딪혀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 되는 공간. 아무도 신경쓰지 않고 오로지 홀로 그 작품을 바라보며 울고 웃는 시간.


힐러리는 그 근사한 시공간 안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정작 영화를 제대로 보게 된 것은 영화관에서 일을 한지 30년이 지나고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가 떠난 후였다.


그녀와 함께 오랫동안 함께 일을 했던 영사 기사는 말했다. 이토록 멋진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결점 때문이라고. 이 필름은 24프레임으로 연결된 사진일 뿐이지만 빛이 통과해 스크린에 부딪히면 마치 실제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우리 또한 결점 때문에,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영원불멸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더 흥미롭고 재밌는 것이 아닐까.


누구나 가슴 한켠에 고통과 상처를 품고 살지만, 우리가 그 불완전함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세상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고 작은 행복에도 눈물 겨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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