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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ypyo Oct 11. 2023

선의의 경쟁

경쟁에 굳이 ‘선의’라는 수식을 하는 바람에 ‘경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를 악물고 승자가 되기 위해서 몰입하는 모습이 미친놈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승자독식, 사다리 걷어차기와 같은 불공정함이 판치는 이 세계에서 경쟁이 어울리지 않는 가치이기 때문일까.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408899?sid=102



어쨌든 가장 공정한 의사결정 방식을 다수결로 채택한 자본민주주의는 경쟁사회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이기기 위해서 뭐든 한다. 좌우 대립과 지역 갈등을 조장해 감정에 호소하는 문화에서 자란 우리는 공정한 경쟁이란 무엇인가에 어리둥절하다.


이기고 지는 게임에서 지면 발언권을 잃는다. 발언권을 잃으면 부당함 호소가 불가능해진다. 소수의 의견을 듣지 않는 사회는 불공정과 불평등에 무감각해진다. 가진 자가 빈자를 두둔하면 위로지만, 빈자가 빈자를 두둔하면 그냥 어거지다. 억울하면 경쟁에서 승리하라는 교훈은 강력하다. 그러나 경쟁이라고 불리는 것들에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승부가 난 것들이 많다. 그래서 경쟁이란 것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그래서 나는 이상할만큼 경쟁을 피하는 것일까. 무리하게 누군가를 이겨보고 싶은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다. 이유는 모르겠다. 정신분석을 해보면 피해망상, 애정결핍 또는 현실도피 같은 구체적인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경쟁을 기피한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았나. 경쟁 대신에 뭔가 독보적인 존재가 되고 싶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싶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 싶었다. 했다가 망하기도 했고, 나중에 보니 이미 누군가 가본 길이기도 했다. 그러나 부족한 나로서는 그냥 경쟁을 피해 돌아나간 길이었다.


내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나타나면 포기한다. 그리고 그곳을 벗어난다. 돌아간다. 내 에너지를 그곳에 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황한다. 방황하면서 하는 일은 읽고 쓰기다. 가끔 무언가를 만들어보는데, 그것은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러다 어떤 지점에서 이건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작품)을 할 기회가 온다….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쟁에 나서기보다는 나를 찾는 여정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정신이 환경과의 경쟁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일단 입질이 오면 들이대는 거다.


나는 경쟁사회에서 결점이 많지만 그래도 경쟁의 장인 스포츠를 좋아한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슈퍼스타들은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내가 잘했고, 못했고, 팀원이 도와줘서 운이 좋았고, 열심히 노력한만큼 성과로 보상받은 거 같아서 기분이 좋고 등등의 말들은 내게 경쟁의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나는 내 갈 길을 가는데, 무슨 일이 있어요.”라고 묻는 것 같다. 한 끝 차이로 골이 결정되는 순간, 피나는 연습으로 쌓아올린 본능이 지배하는 모습에 희열을 느낀다. 경쟁의 장에서 제일 중요한 건 경쟁 그 자체보다는 게임과 자신에게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느냐이다.


주변을 신경쓰면서 내 할 일을 못하거나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경쟁이 아니다. 또한, 누군가가 하고 싶은 일을 못하게 하거나 그의 재능을 펼쳐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도 경쟁이 아니다.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이 ‘선의의 경쟁’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경쟁이 나와 타인, 그 누구를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상승시킨다면 선의의 경쟁이라고 불릴 수 있을까.


경쟁은 대상과 싸워서 이긴다는 단순한 의미보다 상승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더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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