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일정보다 오랫동안 해외출장을 다녀온 동기 김의 눈은 어느 때보다 조금 더 지쳐 보였다. 다시 또 멀리 나가야 된다는 소식을 출장에서 돌아오자 말자 들어야 했고, 이번에 떠나면 여름이 지나서야 보게 될 것 같아서 급하게 저녁 식사자리를 만들었다.
통닭에 소주.
"그래 이거 먹고 싶었어."
영국에는 없는 이 조합이 조금은 그리웠다는 말에 너무 일반적인 메뉴를 선정하지 않았나 걱정했던 나는 다행이다 싶었다. 자리에 앉아 직장인들이 흔히 나누는 대화를 이어갔다. 우리 회사 상황이 어떻고 옆 회사 연봉은 얼마고 이직하는 주변 동료들의 안녕과 더불어 우리는 왜 아직도 이러고만 있냐는 식의 말들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만족을 모른다. 대부분이 불평과 불만이었고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서로가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분위기도 더러 있었다. 출장에서 복귀한 동기를 반갑게 맞이하는 자리에 함께한 녀석까지 포함해 여기 모인 둘은 아직 총각이었다. 37세.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었나 싶었다. 총각과 아빠의 관심사가 달라서 그런지 따분한 주제가 끝나가자 이후의 주제를 선정하기도 싶지는 않았다.
그러다 김은 한참을 밖에서 통화를 했다. 왜 이렇게 오래냐며 농담으로 핀잔을 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사뭇 심각했다.
"친구가 죽었어."
울적한 표정으로 김은 말을 이어갔다.
"출장 가 있는 동안 친구가 죽었어. 아직도 실감이 안 나는데 가족들도 정확한 이유를 이야기해주지 않아서...잘 모르겠어."
"우울증이었나. 혹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아니겠지?"
이름도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의 죽음과 김의 슬픔에 얼마 전 유명을 달리했던 지인이 생각나 그 마음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했다.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번아웃도 이제 병 이래. 세계질병관리본부 같은 곳에서 병으로 지정했고, 이후에 관련 연구와 치료가 활발히 이루어질 것 같다고 하네."
그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최선을 다한 자에게 선물과 보람과 칭찬 대신 돌아온다는 번아웃을 테이블 위로 생뚱맞게 올렸다.
번아웃이란 어쩐지 억울한 것 구석이 많다. 그 병을 얻을 수 있는 자격도 성과가 높은, 스스로 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자들에게만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 토사구팽.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존재. 그런데 누가. 주체가 불분명한 이 병에 걸리는 자는 결국 욕망이 가득한 도시의 노예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라는 말은 흔히 타자에 의한 지배관계 속에서 쓰인다. 선택할 권리를 잃은 자들. 정해진 틀과 그 틀에 박힌 삶. 거푸집처럼 찍어내는 대로 살아가는 존재. 시대를 거듭하며 이렇게 속박하는 것들로부터 우리는 자유롭고 싶다고 외치며 살아왔다. 희생 없이는 자유도 없다는 구호가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내주었던 시대를 지나서 자유 없이는 희생을 할 수 없는 오늘에 닿았다는 생각이 든다. 자유인 아무개는 자유롭게 자기 자신을 어딘가에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어느 대학의 한국인 교수는 주종이 일치하는 이 시대상을 두고 피로사회라고 했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왔다. 시대를 대표하는 병이 있다는 말로 시작하는 피로사회의 내용처럼 나도 그 어느 틈 바구니에서 병들어 열심히 쳇바퀴를 굴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많은 말을 쏟아 냈지만, 정작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굴레를 돌리는 두 발을 떼어 내고 막힌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하지만 돌아가는 바퀴는 멈추지 않고 둘러싼 울타리를 뚫는 것은 보통의 힘으로는 어림없다. 결국 자유란 없다. 허상일 뿐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즈음에 적당한 취기가 오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우리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는 것일까. 우리에게 주어진 길.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
"그러니깐 우린 지금 봄을 건너 여름 초입에 들어선 것과 같은 거야. 씨를 뿌리고, 고랑을 다듬고 그래서 가을이 되면 풍년을 맞이하고 겨울이 되면 잎이 떨어지고 땅으로 사라지겠지. 어쨌든 지금은 성장하는 단계이고 우리가 뿌려둔 씨가 없거나 고랑을 파지 않으면 가을에는 초라해지는 거야. 그래서 지금 당장은 보이는 것이 없더라도 열심히 내가 목표한 바를 위해 달려갈 거야. 내 아들에게도 이런 젊음을 종용하겠지.”
돌아오는 길에 뱉은 말을 되내어 보고는 이직한 어느 형에게 연락을 했다.
"형 잘 지내? 거긴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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