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조선이 만난 아인슈타인
1895년 10월 8일 조선의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하는 초유의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일컬어 을미사변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의 주도하에 조선 관리의 도움으로 실현되었다. 그 중심에는 일본식 신식 군대인 별기군 훈련장을 역임한 우범선이 있었다. 그는 민비 살해를 위해 낭인들과 궁으로 들어갔고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우는 것을 관장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일본인 여자와 재혼한다. 한국에서도 그의 처와 딸이 있었지만 그는 특별히 돌보지 않았다. 이후 일본인 부인 사카이 나카로부터 아이를 얻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생물학자 우장춘이다.
우장춘은 도쿄제국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고, 이후 ‘우의 삼각형’이라는 종의 합성과 종간 잡종의 개념을 제시하는 세계적인 업적을 달성한다. 이후 일본에서 농학 연구소장을 지냈는데, 해방 후 한국은 재배할 수 있는 식량 종자가 없어 긴급히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기자시절에 우장춘을 한국에 알렸던 경남도 농림국장 김종의 설득과 일제감정기에 우범선의 심복과 함께 옥살이를 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연이 크게 작용한다.
이후 우장춘은 지금 김치배추의 종자를 개발했다. 그 덕분에 김치를 계속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제주도, 거제도의 귤재배의 시작도 모두 우장춘의 업적이었다. 6.25 전쟁 중에도 연구에 몰두했던 그는 한국어도 잘 모르는 일본인으로 살다가 갑자기 한국의 농업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아직도 모른다. 그저 이 말만 회자된다.
“그동안 어머니의 나라 일본을 위해 일본인 못지않게 일했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의 나라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 나라에 뼈를 묻겠다"
우장춘의 막내딸은 일본의 경영의 신 이나모리 가즈오의 아내다. 당시 이나모리 가즈오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이후 교세라를 창업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들었고, 망해가던 일본의 대표 항공사인 JAL를 인수해 흑자 기업으로 회생시켜 경영의 신으로 불린다. 또한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선수 박지성이 몸담았던 교토 퍼플 상가의 구단주였다. 박지성은 그곳에서 이미 계약이 끝난 상태였지만 결승전에 출전해 구단의 첫 우승을 만들어낸다.
매국노의 아들이 우리나라의 굶주림을 해결했다는 역사적 아이러니와 같이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얽히고 설켜있다. 이 책은 일제감정기에 우리나라 지성인들의 복잡하게 설킨 활약상이 그려져 있다.
상대성이론을 일찍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전국 순회 강연을 하면서 독립 운동을 했다는 이야기 또한 너무나 새롭다. 그리고 그것을 주도했던 황진남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역할을 했지만, 오키나와에서 쓸쓸히 죽었으며 2019년에서야 건국훈장을 받고 2023년에 현충원으로 안장되었다는 사연은 너무나 씁쓸하다. 그 이유가 해방 후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면 극도로 분열된 정치가 얼마나 사회 진보를 틀어막는 결과로 이어지는지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서재필, 여운형 등 너무 재미난 역사적 인물들의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우리나라 지성인들의 천부적인 자질과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황에서도 국제 정세에 맞춰 외교를 펼쳐나가는 모습은 과히 고무적이다.
책의 저자 민태기 작가는 서울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누리호 터보엔진을 만든 사람이다. 그는 메카니즘뿐만 아니라 역사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과학발전은 역사적 맥락에서 발현되며 과학기술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기술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넓게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우리나라 과학사를 역사적 맥락에서 서술하기로 마음 먹고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그가 수집하고 모은 다양한 당시 언론 기사를 많이 활용하고 있다. 그것을 보는 것또한 아주 색다른 경험이었다.
작가가 의도한대로 이 책은 충분히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고 어떤 일을 해나가는 데 큰 동기부여가 될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