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컨대, 병에 걸렸다. 일종의 난독증이다. 텍스트를 눈에 떼지 않고 있지만 읽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읽기라는 것은 깊은 사유의 출발인데, 나는 어느 것에도 집중하지도 도달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것의 방증은 무엇이냐면 계속 생각이 겉돈다. 말로 설명하기는 힘든데, 매 끼를 배달음식이나 간편식으로 떼우는 기분이다. 배도 부르고 맛도 좋은데 어딘가 허전하다. 레시피를 공부하고, 식재료를 구해서 정성껏 맛을 낸 다음 소중한 사람과 나눠 먹는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깐 정보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해 뒤쳐지고 있다는 조바심과 좇기고 있다는 기분. 어쩌면 그 감정이 나를 계속 채찍질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온몸으로 느낀다. 필요한 순간에 효율적으로 반응하는 것보다 나의 욕망을 위해 숭고한 시간을 투자해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몇십 년을 준비한 무대 위에서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내려와 느끼는 그 허무함이 더 낫다는 것을. 여정이 짧은 여행일 수록 여운도 짧은 법이다. 반대로 여정이 긴 여행은 인생을 바꾸기도 한다. 그 여정이란 정의는 단순하게 일정의 문제가 아니다. 수동이냐 능동이냐, 반응이냐 정성이냐, 수단이냐 목적이냐, 지식이냐 지성이냐, 겉이냐 속이냐, 발광이냐 인내냐로 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