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여행의 이유 - 김영하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덕분에 집안 청소를 했고, 아이가 자는 틈을 타 영화도 몇 편 보게 되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빗줄기가 줄어 드더니 창문 밖 거리에서 사람들이 우산을 접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바람도 쐴 겸 집안 부족한 가재도구 등을 사러 나가기로 했다. 급하게 차려 입고 작은 도시에 있는 마트와 쇼핑몰이 붙어 있는, 큰 도시의 것을 겨우 흉내 낸 듯 하지만 그래도 백화점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갔다. 주차장 입구는 생각보다 붐볐고 도로 위 차들은 건물이 혀를 길게 늘어뜨린 듯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생각보다 일찍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잠깐의 쇼핑을 하고 생각해보니, 지하와 지상이 마트와 쇼핑몰로 나누어져 있어 무료주차를 하기 위해서는 지하 공간에서 소비가 필요했다. 그때 지하 주차장 입구에 있던 작은 서점이 보였고 나는 내일도 비가 온다는 예보를 들었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요량으로 베스트셀러 첫 번째 칸에 있던 김영하 작가의 산문 <여행의 이유>를 샀다.
1. 여행이란 무엇인가
여행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은 참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말투로 정의를 내리기도 했다. 에세이의 절반이 그런 내용이다. 서점형 카페가 성행하는 요즘에는 머무르는 숙소마다 창문이나 벽면에 여러 작가들의 목소리를 옮겨 붙여 두기도 했다. 그중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여행은 새로운 눈을 가지는 것"이다. 김영하 작가의 책은 이 구절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언제나 고정되지 않았다는 것. 나는 나지만 또한 내가 아닐 수 있다는 것.
- 여행은 썸바디가 아닌 노바디가 되는 것
무아라는 개념은 오래된 불교의 화두다. 또한 다양한 인종과 다양한 가치관의 혼재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 것인가로 갈수록 새로워지고 있는 질문이다. 기술의 발달로 확장된 생활범위 속 우리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정체성에 피곤이 따라온다. 그래서 탈진하는 경우, 내가 누군지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 경우 우리는 여행이라는 수단을 택한다.
- 내가 누군지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어느 누구의 고백이다. 그 고백이 긴긴 순례길을 돌아 자신의 집과 일터로 돌아왔을 때, 어떠한 답으로 돌아올까. 나도 궁금하다. 경험상 특별한 답이 없다는 것에 더 수긍이 가기 때문에 그 장면을 안타깝게 바라봤던 기억이 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이란 개념은 새로운 장소로의 이동으로 시작되었다가 그 새로운 환경이 주는 여러 가지 감성들과 가치관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들로 책을 풍성하게 꾸민다. 결국 그 여행이라는 것은 어디 다녀왔다는 인증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이 장소를 기점으로 서술되는 플롯이라고 해도 그 주제는 정신적인 요소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 생각지도 못한 뷰, 생각지도 못한 단어, 생각지도 못한 문화, 그리고 생각했던 것과 달랐던 사실 등이 어떻게 나에게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가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것이 몇 달, 몇 년 뒤 나에게 남긴 변화가 여행의 끝이다. 따라서 김영하 작가 또한 그의 숱한 여행들이 이 책을 통해 하나의 점을 찍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 있어도 여행이란 이처럼 정신적 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행위의 총체들이다.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책이다. 그리고 낯선 곳에서 마주하는 일상들. 그로부터 나는 노바디가 된다. 그리고 우울한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롯이 현재에 머문다. 머문다는 것은 멈춤이고 나와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이다. 그리고 그때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는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다.
김영하 작가는 이와 같은 여행이 가지는 현재성에 아주 큰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 과거와 미래라는 양 끝의 존재가 잡고 흔드는 나를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그래서 김영하 작가는 나를 지우고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이는 그 경이를 느꼈다면 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했을 것이다. 책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존의 작품(과거)을 끊고 다른 작품에 대한 부담(미래) 안에서 흔들리는 자아를 부여잡고 펜을 잡을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여행이었을 것이다.
2. 돌아갈 곳이 있기 때문에 여행은 즐겁다.
사실 여행이 즐거운 것은 돌아올 곳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고통과 불편이 따르더라도 여행은 즐겁다. 만약 내가 돌아갈 곳이 없다면 여행 그 자체는 고난이 된다. 난민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지금 내가 머문 곳이 돌아갈 곳이 되려면 떠나야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린 이 소중함을 각인하고자 떠나기도 하는 것인 줄도 모른다.
내게 있어서 그 머물 곳이란 비단 집과 고향뿐만 아니라, 글과 음악 등 창작 활동도 포함된다. 눈과 귀와 입을 통해 새로 맞이하는 것들은 그것들이 종착지다. 이것이 없으면 여행은 즐겁지가 않다. 먹고 놀고 찍고 돌아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SNS에 올리는 인증샷과 주변의 반응은 허망하다. 나 스스로 곱씹어 보지 않으면 그 기억은 지워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떠나고 돌아왔을 때 나의 집에서 나의 책상 위에 놓인 노트와 컴퓨터로 겹겹이 쌓인 새로운 경험이 옮겨질 때, 나는 비로소 기쁘다. 그리고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여행은 글과 음악으로 계속된다. 그리고 한정된 예산과 시간으로 짜인 여행은 다른 사람들의 수기와 갖가지 정보들로 인해 재구성된다. 돌아와서 내가 그 여행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즐겁다. 따라서 가끔 일상을 벗어나 세계여행을 떠나서 좋다는 식의 경험담에 큰 공감을 할 수가 없다. 안식의 부재가 가져다주는 것은 또 다른 피곤일 것이기 때문이다.
3. 책은 좋습니다.
어쨌든 이 책을 보며 김영하 작가가 참으로 나이가 많이 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침없던 초기작에서 이렇게 유하게 대중을 위한 글을 쓰는 그 모습이 저는 어쩐지 반가웠습니다. 저처럼 한적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격한 정신적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또한 어디든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읽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여행을 궁극적으로 재밌게 해주는 나의 정신적 고향은 어디일까 한 번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