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국평오라는 것을 아시나요?

by 랩기표 labkypy

국평오란 단어를 처음 봤다.​ 무슨 말일까 하고 기사를 열어보았더니, 자기혐오의 뜻을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우리 사회에 대한 실망으로 다가왔다. 신실하고 논리적인 지성인이 싸움을 걸어오는 건달에게 몇 대 맞고는 그래도 나는 당신을 용서한다고 부르짖는 모습이 겹쳤다. 그걸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나도 싸움을 잘할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패고도 껌값으로 합의금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구경꾼과 국평오는 동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나는 원래 안 되는 놈이야 하며 연필을 부러뜨리고 다가오는 시험을 회피하는 방법을 택하는 것처럼 모두가 회의주의자가 되었다.

통계와 평균은 현실을 왜곡하고 싶어 하는 입장에서는 아주 유용하다. 통계적으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확률적으로 높다는 말입니다. 평균적으로 우리는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평균적 인간들이 개돼지에는 발끈하지만, 국평오에는 그럴 수 있지라고 생각하는 형상을 보니 우리사회에 제법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국민 수능 평균 오등급'은 결국 개인을 왜곡시킨다.

언어는 생각의 틀을 결정한다. 이런 특정한 의도를 가진 단어가 통용될 때는 현실이 잘못 굴러가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 출처를 굳이 찾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공감하는 무리는 현실을 비꼬는 사이다 같은 표현에 환호한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에서 도망치기만 급급한 선장이 방향키를 잡지 않고 흔들리는 선체 따라 이리저리 춤을 추는 꼴처럼, 대외적인 위기에서도 살림살이 잘 꾸리지 못하는 지도층을 보고 우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논리 정연한 구색을 갖춰 정중한 태도로 그들에게 의견을 제시해보지만, 결국 돌아오는 건 진흙탕 싸움이고 나약한 우리는 엉엉 울면서도 두고 보자라는 말 대신에 미워도 다시 한번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런 사정들이 계속되다 보니 국평오 같은 자기 비하 발언들이 쉽게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느 나라 국민이 스스로를 낮추고 싶을까.


뛰어난 문장을 인용한다고 하여 좋은 글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특정한 말을 옮긴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가 꼭 그렇게 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상스러운 말을 하면서 품격을 찾는 것도 우스운 꼴이다. 우선적으로 말투부터 바꿔보자고 한다면 유식한 척 겉으로 흉낼 것이 아니라 생각과 행동에 품격을 갖추는 것부터 시작해야 된다. 무엇을 보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고 인생 선배들이 폴어야 할 숙제이다. 과연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

한 의원은 편을 가르고 싸우기만 혈안이 되어 있는 정치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편을 가르면 대화와 토론보다는 당장의 싸움에 이기는 것이 우선시된다. 사안의 중요성을 두고 제대로 이야기해보자고 해도 당장의 싸움에서 지면 소용없다. 패자는 물러나게 되고 물러난 자리에는 발언권이 없다.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기만 한다고 해서 승리할 수 없다. 누군가는 쓰러져야 끝난다. 문제는 쓰러지고 쓰러져도 다음 주자는 무한대라는 것이다. 그 사이에 문제의 본질은 사라진다. 이 사태를 보고 힐난해도 그들은 '어린 친구, 세상을 잘 모르는구먼 허허허.' 하고 넘겨버린다.

이에 맞서 30~40 기수론이 솔솔 흘러나온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좋은가. 이 모든 것이 믿고 볼 수 없는 언론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에 나는 또 어떤 의심을 품어야 할지 피곤해질 뿐이다.

어쨌든 우리가 스스로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부류는 이런 문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생각해본다. 원래 있던 것을 굳이 조명하여 도드라지게 보여주는 것에 너무 눈을 뺏길 것이 아니라. 도대체 왜 이런 말들이 유통되고 있는지 고민하고 살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눈 앞의 싸움에 치고박느라 정신없는 그들을 압도하는 거대함을 마련해야 된다.

고민은 원래 귀찮고 힘들고 비효율적이다. 그 귀찮고 불편한 것으로부터 세상은 서서히 변화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