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공학처럼 다가온 AI 연구 일대기.
‘거북선의 라이트닝 볼트 발사 매커니즘을 설명해줘’라는 황당한 질문에 AI가 진지하게 헛소리를 늘어놓던 때가 있었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장치에 대해 어찌나 진지하게 설명하는지, 진짜 조선시대에 그런 기술이 있었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할루시네이션’이라는 현상 때문이었다. AI가 학습한 자료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못하고 그저 요구받은대로만 대답하는 오류였고, AI를 통해서 정보를 제공받으려는 사람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오류였다.
하지만 2024년 5월, Chat GPT의 혁신적인 발전이 찾아왔다. GPT-4o라는 이름의 AI였는데, 이 네이밍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GPT-4의 사소한 업데이트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체감 성능으로는 GPT 3.5에서 4로 넘어올 때보다도 더 큰 도약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일반 사용자들에게 AI는 이미 관심 밖이었기 때문이다. 지속되는 할루시네이션 현상 때문에 유저들은 유료 서비스에 돈을 내가며 꾸준히 사용할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허황된 대답만 늘어놓는 장난감 정도로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1월부터 지속적으로 GPT의 사용법을 연구해왔던 덕택에 업데이트로 인해 달라진 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 이거 가능성 있겠는데?' 비록 프로그래머나 AI전공자들에 비하면 늦은 깨달음이었지만, 꽤나 희망적인 미래가 그려졌다.
결국 나는 이 기술을 본격적으로 배워보기로 했다. 5월부터 지금까지 나는 AI와 함께 다양한 시도를 했다. 소소한 앱을 몇 개 만들어보고, AI로 만든 이미지로 인스타그램을 연재하고, 글 첨삭도 받아보았다. 내가 발견한 팁들을 친구들에게 공유하고 가르치면서, 점차 이 분야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다.
내가 AI를 다루는 방식은 마치 미국의 개러지 문화나 DIY와 유사했다. 미국인들이 사소한 고장은 전문 정비소에 맡기는 대신 자신의 차고에서 직접 수리하듯이, 나도 전문적인 지식을 공부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이 만든 워크플로우와 프롬프트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며 나만의 것으로 만들어갔다. 이론에 기반한 연구보다는 실험을 통한 발견이 먼저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점차 오차 범위를 좁혀가는 방식이었다. 매뉴얼을 보지 않고도 부품을 하나씩 조립 및 분해해 가며 배워가는 DIY처럼, AI 또한 완벽한 이해 없는 상황에서도 실전을 통해 배워나갈 수 있었다.
오타 하나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서 디버깅을 해야만하는 코딩과는 달리, AI는 부딪혀가며 배우는 실용적인 접근이 더 중요했기에 나 같은 비전공자도 충분히 의미있는 연구결과들을 쌓아나갈 수 있었고, 이전에는 현실의 장벽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새로운 도전 과제로 보이기 시작했다.
AI는 사람이 만든 기술 중에서도 독특한 면이 있었다. 내가 이공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관심이 많았던 사람으로서, 또 관련 업계 지인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AI기술이 가진 특별한 성질이 있었다. 바로 '블랙박스'라는 특성이었는데, 이는 AI가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과정을 명확하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사람 뇌의 구조를 모방해서 만든 기술임에도 불구하고 완벽히 이해한 채로 쓰는 게 아니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했다
게다가 기존의 다른 과학 기술들과 달리 이론을 토대로 착실하게 실험해서 발명해내는 느낌이 아니라, 이미 발명되어버린 것을 끊임없이 실험하며 새로운 용도를 발견해가는 상황이란 점이 특이했다.
이런 특성을 생각하다 보니, 이전에 재미있게 본 Netflix 애니메이션 '아케인'이 떠올랐다. 리그 오브 레전드라는 게임의 세계관에서는 '마법공학'이라는 기술이 나온다. 미지의 마법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공학이 혼합된 기술인데, 이 기술을 애니메이션에서 표현하는 방식이 마치 AI를 대하는 요즘의 분위기와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났다. 애니메이션에 나온 마법공학이 그러했듯 AI도 그 잠재력 엄청나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실용성도 충분히 체감하지만, 과연 이걸 완벽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써도 되는 걸까 하는 그 미지의 공포가 존재하는 점이 말이다.
내가 처음 AI를 접할 때의 심정을 생각해보면, 아케인에서 마법공학을 연구하던 제이스와 빅토르가 느꼈던 심정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호기심과 공포가 공존하는 그 묘한 불안감 말이다. 나 또한 들려오는 여러 소문들 때문에 AI가 조금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떤 회사에서 AI 기술이 뛰어난 테크니컬 아티스트를 뽑으면서 신입 아티스트 7명을 해고했다는 괴담이 들려오기도 했고.
나는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필사적으로 느꼈다. 이 기술을 내가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기본기를 높이던가, 아니면 AI를 내 힘으로 만들던가. 그리고 난 후자가 더 마음에 들었다. 나는 항상 호기심이 많았고, 신기술을 익히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IT 덕후로서의 호기심도 있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창작의 영역이 넓어진다는 욕심도 함께했다.
글도 쓰고 싶은데 디자인도 같이 하고 싶었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둘 중 하나를 완전히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디자인 작업의 보조 도구로 시작했던 AI 연구가, 어느새 내 주요 관심사가 되어있었다. 작업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을 뿐인데, 어느새 연구 자체가 더 재밌어진 거라고 해야겠지. 프롬프트를 정교하게 다듬고, 이미지 제작 AI의 워크플로우를 개선해 좋은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내가 AI를 다루는 실력이 늘어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결과물들이 나오는 것들을 보며 점차 창작이라는 내 본질을 잊기 시작했다.
마치 마법공학을 연구하다가 어느 순간 그 힘 자체에 매료되어버린 빅토르마냥 점점 내 중심이 옮겨가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 힘을 점점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마저 비슷했다. 그러나 ‘그걸 이해해서 뭐할건데?’하는 의문이 들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난 AI 전공자도 아니고 그저 디자이너였으니까.
아마도 이건 내가 창작자들 사이에서 AI 얘기를 꺼내기 어려웠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AI를 활용한 작업은 순수 창작이 아니라는 편견을 내면화하고 있었고, 여기에 창작계의 전반적인 AI 거부감까지 더해지며 나는 점점 더 눈치를 보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이걸 활용해서 무엇을 창작할까 하는 고찰보다는 기술적으로 어떻게 개선하면 더 좋은 퍼포먼스를 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만 집중하게 된 셈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AI 기술에 대한 반감은 창작 영역의 사람들 쪽이 특히 심했다. 마치 카메라가 등장했을 때 화가들이 절망했던 것처럼, 노동자들이 자동화 기계에 맞서 러다이트 운동을 일으키듯 반대하고 배척하려 했다. 오죽하면 어떤 게임회사의 원화가 모집 요강에서는 'AI에 대한 반감이 적으신 분'이 우대사항 중 하나였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나는 미대 동기들에게도 AI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쉽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창작 영역보다는 실제로 AI에 대한 거부감이 적은 일반 직장인인 친구들과 데이터 및 프로그래밍을 다루는 친구들에게 더 많이 이 얘기들을 꺼냈다.
하지만 막상 나와 가까운 웹툰 작가 친구나 토이메이킹하는 친구의 반응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창작의 고됨을 이해하고 있고, 자신의 예술적 정체성이 고작 기술 하나로 인해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그들의 높은 자존감이 담긴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괜히 막연한 두려움으로 인해 내 주된 영역에서 벗어나있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영역에서 이 이야기를 진행해나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창작자가 되고 싶었다. 나 역시 게임 개발자였기도 하고 말이다. 영화와 게임은 미술, 음악, 기술이 어우러지는 종합 예술이지만, 과거에는 각 분야마다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 AI가 있다. 한 사람의 창의력이 AI의 도움을 받아 더 넓은 영역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연재를 통해 내가 AI를 활용하며 걸어온 여정을 나누고자 한다. AI를 터부시하지 않고 친숙하게 다가가는 법,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의 창작 영역을 넓히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싶다. 단톡방에서 지인들과 나누었던 발견과 고민들을, 이제는 더 많은 창작자들과 나누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