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원아파트 문방구의 하루

90년생 어린이의 평범한 하루.

by 진하린
"야, 야려봐. 얼른 얼른"


문방구 앞 오락기로 열심히 메탈슬러그를 하고 있던 내 친구는 난데없이 습격을 받았다. 동네 형이 자기도 게임을 하겠다며 강짜를 놓는 것이다. 친구는 처음에 화를 내보려 했는지 표정을 살짝 찡그렸으나, 이내 압도적인 체급차를 인지하고는 풀죽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도 덩달아 구경을 접었다.

흥미로운 구경거리와 다양한 계층이 충돌하고 섞이는 이 곳은 문방구 앞 생태계였다.


여기는 보원아파트 문방구. 토월초등학교를 기준으로 북쪽구역에 있는 삼성 1차 아파트, 보원 아파트, 삼성 2차 아파트, 그리고 사실상 변방이라 부를 수 있는 우리 건영 아파트까지, 4개 아파트 단지의 핵심이 되는 장소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항상 초등학생들이 바글바글 거렸다.


어릴 적의 나는 두 곳에서 여가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나는 내가 사는 건영 아파트 뒤쪽에 있는 광교산 약수터 쪽이었다. 곤충채집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이곳은 포켓몬스터의 태초마을처럼 다양한 곤충들을 직접 발견하고 채집할 수 있는 좋은 곳이었다. 심지어 물도 맑아서 1급수 이상에서만 산다는 가재와 플라나리아마저 살고 있었으니, 대부분의 시간은 이곳에서 보내도 충분했다.


하지만 사회성이 발달할 나이인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는 외지인들과의 외교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원아파트까지 나가야만 했다. 우리 아파트와 보원 아파트 사이를 가르고 있는 삼성 아파트 대단지를 지나, 무려 7분이나 걸어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집에서 일부러 그쪽으로 찾아가기보다는 보통 하굣길에 들르곤 했다. 토월 초등학교에서 건영 아파트까지 가는 경로에 보원아파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주력 컨텐츠는 문방구와 둘리김밥이었다.

오락과 식문화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우리 같은 꼬꼬마들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장소였다. 특히나 나는 테니스를 치시던 엄마께서 점심에는 둘리김밥을 가라는 지령을 내리셨기 때문에, 학교가 일찍 끝나는 수요일이나 토요일 즈음에는 거의 항상 방문했다.


심지어는 엄마가 가라고 시키지 않아도, 그냥 김밥이 먹고 싶어서 혼자 가서 아주 맛있게 먹은 다음, '엄마가 계산해주실 거에요'라고 말하는 당돌함마저 보였다. 물론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지만, 아직도 엄마께서 그렇게 주장하시니 '어릴 적 나는 생각보다 대담했구나' 하며 놀라울 따름이다.

왜냐면 지금의 나는 식당에서 반찬 리필 한 번 요청하는 데도 용기가 필요한 어른으로 자라났거든.



그렇게 에너지를 충전하면 당연하게도 문방구 컨텐츠를 즐기러 갔다.

보원 아파트 문방구 앞에는 2대의 게임기가 놓여있었다. 그 중 하나는 동물 철권이고, 나머지 하나가 앞서 말했던 메탈 슬러그였다. 나는 게임개발자까지 경험한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놀랍게도 게임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에 친구들이 하는 걸 구경하기만 했다. 직접 돈을 넣고 게임을 하면 동전이 아까울 정도로 빨리 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보다는 문방구 안에서 고무동력기나 연날리기 세트, 그리고 장난감 총싸움인 서바이벌용 총기를 살피는 데 에너지를 더 썼다. 동네 서바이벌 놀이에서는 다양한 총기류를 사용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레밍턴이라는 총에 가장 많이 당했기에 그걸 사고 싶었다. 하지만 권총이 아닌 산탄총을 베이스로 한 모형총기인지라 가격이 비싸 사지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박스 더미 앞에서 침만 삼키다 돌아섰는지 모른다.





그렇게 아이쇼핑을 충분히 즐기고 나면 아폴로를 하나 사들고 나와서 쪽쪽 빨면서 보원 문방구에서 설치한 미니카 트랙으로 향했다.

미니카 트랙은 말 그대로 미니카들을 달리게 만든 트랙이었는데, 회색의 PVC 재질로 보이는 트랙을 3열로 붙여놓은 구조였다. 그래서 동시에 3대의 미니카가 경쟁을 할 수 있었고, 중간에는 360도 회전구간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일 때 나온 「우리는 챔피언」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미니카 레이싱을 주제로 했기 때문에, 당시 동네 아이들은 저마다 차 한 대씩은 기본으로 갖고 있었다.

삼십대 중반인 나도 아직 내 차가 없는데, 대단한 녀석들.


하지만 그 차들도 현실의 차들처럼 엄격한 급 나누기에 시달렸는데, 아까 말한 360도 회전구간이 급 나누기를 결정짓는 통곡의 벽이었다. 블루모터, 레드모터, 블랙모터 등등 미니카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다양한 모터들은 당연히 가격에 따라 성능이 달랐는데, 하급 모터라 볼 수 있는 블루모터를 가진 친구들은 마치 티코나 프라이드처럼 레이싱 경쟁의 하류층에 속해 있었다. 이들은 360도 회전 구간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에 승부 이전에 완주부터가 힘들었다.


그리고 내가 속해 있던 중류층은 레드모터를 사용했다. 그저 완주에 의의를 두는 나 같은 친구들도 있었고, 상위 클래스 진입을 노리며 경쟁심을 불태우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 레벨부터는 미니카를 분해해서 모터만 따로 교체하는 정도의 성의도 가지고 있었고, 휠의 종류까지 신경 쓰곤 했다. 아마도 내가 곤충채집에 쏟던 열의를 조금만 이쪽에 쏟았어도 상류층으로 갈 수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내 승부욕은 딱 완주에서 멈췄다. 1등은 못 해도 꼴찌는 아니면 된다는, 지극히 중류층다운 마인드였다.


마지막으로는 블랙모터 이상을 쓰는 상류층이었는데, 이들의 퍼포먼스는 트랙 밖으로 튀어나갈 정도였기에, 가끔은 너무 '우수해서' 완주를 못하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보통은 초등학교 저학년인 우리보다 주머니 사정이 나은 고학년들이 이런 차들의 오너였는데, 그들은 마치 엘리트 스포츠 선수들처럼 자기들만의 리그에서 얘기를 했기에, 어렸던 나는 그저 경기를 관람하는 관객의 입장이었다. 저 리그에 참여할 나이도, 경제력도 안 됐으니까.






이런 구경도 물론 재밌었지만, 내가 미니카 트랙 앞에서 죽치고 있던 데는 실용적인 이유도 있었다. 학교가 일찍 끝나고 집으로 바로 들어가기 싫을 때, 여기서 시간을 때우다 보면 테니스를 마친 엄마가 보원 아파트 상가로 오셨기 때문이었다. 보원 아파트 상가 지하에는 커다란 대형 슈퍼가 있었는데, 엄마는 항상 거기서 장을 보셨다.


미니카 트랙에서 시간을 때우던 나를 본 엄마는 우선 둘리김밥에 들러 내 외상을 처리하신 뒤, 적당히 가게 주인분과 수다를 떨고는, 나를 끌고 지하던전으로 내려가셨다. 쇼핑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정말 그 슈퍼가 던전이나 다름없었는데, 엄마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내가 반항기가 없었기 때문에 그저 풀죽은 채 따라다니며 짐꾼 노릇을 해주곤 했다. 물론 중간중간 과자를 사달라는 가벼운 시위를 벌이곤 했으나, 대부분은 거절당했다.


엄마께서 장을 다 보시고 나면 나는 엄마 손을 잡고 다시 장장 7분의 거리를 걸어 건영 아파트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은 거의 항상 해가 기울어 하늘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는 시간이었는데, 노는 시간이 끝나는 아쉬움보다는 설렘을 품고 집으로 갔던 기억이 난다. 공영방송 송출이 끊기는 오후 시간대를 지난 덕분에,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법소녀 리나」, 「황금로봇 골드런」, 「우리는 챔피언」 같은 만화영화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엄마 손을 잡고 걷는 7분은, 아까 혼자 걸어왔던 7분보다 훨씬 짧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하루인데, 이상하게 그 노릇노릇한 하늘만큼은 아직도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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