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아이스의 지치지 않는 회복 탄력성과 도전 정신
BTS, 블랙핑크, 등 K팝 뮤지션들의 행진은 멈출 줄 모른다. 세계적인 뮤지션의 자리로 우뚝 섰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팬층을 확보했다.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음악적인 실력을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별 독특한 퍼스널 브랜딩을 구축하며 럭셔리 브랜드들의 엠베서더 역할까지 한다. 보컬, 댄스, 비주얼, 예능감, 등을 두루 갖춘 '올 라운드' 완벽한 모습을 한 사람에게 몰아 놓은 듯한 육각형 인간이다. 뮤직의 경계선을 넘어서 문화적인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이유일 것이다.
특히, 2023년 코첼라 Cochela에 K팝 그룹 최초로 메인 아티스트로서 개막식을 열었던 것이 블랙핑크였다는 것은 K팝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 해졌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강력한 시사점이 된다. 파워풀한 무대,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들이 직접 제작해 준 무대 의상으로 화제를 불러왔다. 첫 등장에서 한국 전통 의상인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연상시키는 무대 의상을 걸치고 나타난 블랙핑크는 전통 부채춤을 활용한 안무로 화제를 모았던 '탈리'(Tally) 무대도 다시 선보였다.
매년 가장 합한 팝 스타와 내로라하는 해외 셀럽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한 K팝의 영향력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 증명된 순간이었다. 2024년에도 코첼라에 초대되었다.
*코첼라는 캘리포니아 주의 콜로라도 사막에 위치한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 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을 줄인 말로 1999년에 처음 개최된 세계적인 음악 페스티벌이다. 특정 음악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록, 팝, 힙합, 일렉트로닉 등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이는 북미 최대의 뮤직 페스티벌이다.
한 세대의 큰 획을 긋는 뮤지션들이 존재하고 그런 뮤지션 들 중 사업가로 활동하고 있는 분을 만났다. 미국의 래퍼이자 연기자였고, 지금은 부동산 개발자로 거듭난 바닐라아이스 Vanilla Ice.
바닐라 아이스의 끈질긴 회복탄력성과 도전정신에 대해 공유해보고자 한다.
띵딩딩딩딩 띠디 ~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 ~
90년대에 유년을 보냈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노래,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
바닐라 아이스는 ‘빌보드 핫 100의 1위에 랭크한 최초의 힙합 음악’이라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아프로 아메리컨, 흑인들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는 힙합을 백인 레퍼로서 '세계 최초'라는 타이들이 주어졌다. 당시 'Ice Ice Baby'는 1990년 바닐라 아이스의 데뷔 앨범인 'To the Extreme'에 수록된 곡으로 엄청난 음반 판매 수입을 얻었다. 역대 가장 빨리 팔린 힙합 앨범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힙합 Hip Hop이라는 음악 장르에 보다 많은 관심을 보였지만 미디어의 조명을 받기까지 크게 흥한 힙합 아티스트로 알리게 된 계기를 제공한 뮤지션은 없었다. 음지에만 있던 힙합이라는 장르를 양지로 나오도록 그 계기를 만들 수 있었던 뮤지션이 바로 바닐라 아이스였다.
힙합 장르가 대중화된 혁신의 시작이긴 했지만 동시에 말도 탈도 많았던 곡이기도 하다. 퀸 Queen과 데이비드 보위 David Bowie의 'Under Pressure'를 무단 샘플링한 것이라고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결국 Under Pressure의 판권을 자신이 구매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바닐라 아이스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을 것 같아 흥미로운 사실들을 적어보자면 이렇다.
1. 플래티넘 레코드를 획득한 최초의 백인 래퍼이다.
2. 1996년 세계 최고의 제트 스키 경주자 6위로 선정되어 Kawasaki와 계약을 맺었다.
3. 1987년 사우스 댈러스의 한 나이트클럽 밖에서 난 싸움으로 4차례 칼에 찔려 입원했다.
4.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 초안을 16세 때 15분 만에 썼다.
5. 1991년 'People'매거진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6. 전 플로리다 주립 모터크로스 챔피언이었다.
7. 그의 고조부 John Richard Van Winkle은 남북전쟁 당시 아칸소에서 남부군으로 복무했다.
8. 17세기 네덜란드 출신의 Jacob Walichs의 후손이다.
9. 마돈나와 8년을 사귀었다.
10. 2021년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 리믹스가 삼성 에코 광고 캠페인에 일부 사용되기도 했다.
바닐라 아이스의 전반적인 인생을 보면 굴곡이 참 많은 삶이다. 그의 본명은 Robert Van Winkle이다.
1976년 생인 그는 텍사스 주 사우스 댈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4살 때 돌아가셨고 그 이후로 양아버지에게 길러졌다. 어머니는 독일과 영국 혼혈 아였다.
10대 때 그는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고 학교를 자주 빼먹었다. 집안은 가난했고 18세가 되었을 때 학교를 중퇴했다. 세차를 하며 생계를 겨우 겨우 이어갔었다고 한다.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친구들과 사귀게 되면서 점차 랩과 댄스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퍼포먼스를 하면 관객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백인이었기에 '바닐라 아이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1970년은 미국에서 힙합의 태동기였고, 1980년은 실력파 힙합 아티스트들이 주로 뉴욕을 거점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비주류였던 힙합은 특별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흑인 래퍼들의 음악은 방송을 탈 수도 없었고, 음반 입수조차 어려웠던 상황이었다. 인터넷 보급도 되지 않았던 시기라 유튜브나 스트리밍 서비스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시대였다.
바닐라 아이스는 1989년 SBK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라디오 방속국에서도 첫 싱글 앨범 'Play that Funky Music'이 포함된 'Hooked'를 발매했지만 부진한 판매를 면치 못했다. 그러다 한 방송국의 DJ가 퀸과 데이비드 보위의 'Under Pressure'를 샘플링한 'Ice Ice Baby'를 틀게 되었는데 이 음악이 나간 이후로 모든 라디오 방송국에서 그 노래를 틀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이 우연 같은 사건은 1,500만 장 이상이 판매로 이어졌고 역대 가장 많이 팔린 랩송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바닐라 아이스는 이런 비주류 힙합 장르를 주류 문화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는 백인 청소년들이 들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랩 노래 중 하나였던 것이다.
바닐라 아이스 이후로 백인 래퍼로 가장 성공한 뮤지션을 떠올리라고 한다면 에미넴이다. 여러 인터뷰에서 서로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표출하는데 서슴지 않는다. 에미넴의 자전적 영화로 큰 인기를 얻었던 '8 마일'에서 랩배틀을 하는 장면에서 바닐라 아이스를 저격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나왔을 정도다. 이는 에미넴이 당시 가졌던 실력, 이미지를 넘어 정통 힙합을 몰래 듣고 따라 하던 백인 청소년들에게 모두 해당되었던 말이기도 했다. 인종 문제와 결부된 심각한 차별 소재중 하나였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지만 퀸과 데이비드 보위 소송으로 판권을 구매한 후 여러 앨범에서 데뷔 앨범처럼 큰 성공을 이루지도 못했고, 출연한 영화도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다. 자신감도 떨어져 가면서 경제적인 압박에 시달리고 마약 및 자살시도의 어두운 암흑기를 거치기도 했다.
그렇게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반짝 유명 가수로 끝날 것만 같았지만 그는 다시 한번 일어서기 위해 발버둥 쳤다. 1994년 경부터 음악 스타일을 바꾸며 다시 반응을 얻기 시작했다. 또 다른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1991년 후반에는 영화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Teen Mutant Ninja Turtles II: The Secret of the Ooze (1991)에 출현했지만 실패였다. 첫 장편 영화인 Cool as Ice (1991) 역시도 관객들은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결국 박스오피스에서 단 3주만 개봉이 되고 하차하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그 후 본명으로 모터크로스를 2년간 했다. 바닐라 아이스는 2001년 PlayStation 2에 출시된 Championship Motocross에서 비디오 게임 캐릭터까지로도 등장한다. 전 플로리다 주립 모터크로스 챔피언이 되기도 했지만 그 이상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연이은 실패로 또다시 암흑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그런 그의 모습이 사업에 도움이 될 리 없었고 SBK레코드가 파산을 한다. 과다한 약물 복용으로 거의 사망에 이르렀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다시 한번 일어설 기회를 얻게 된다.
결혼을 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나 잦은 해외 및 공연으로 가족생활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1998년에 발매된 'Hard To Swallow'로 컴백하지만 이전 작품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고 노골적인 언어를 사용해 앨범 판매량은 10만 장에 그쳤다. 하지만 팬들에게서 호평을 받으며 뉴메탈, 랩록, 힙합 음악을 컨트리, 레게 등 다른 장르와 결합한 시도를 하게 되었다. Bi-Polar, Platinum Undersground, WTF라는 독특한 장르에 도전하게 된다.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로 명성을 얻은 후 로스앤젤레스, 유타, 뉴욕, 등지에 집을 사기 시작했다. '내 인생 최악의 투자'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부동산 개발업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계기로 2010년부터 대략 1년이 넘는 시기동안 '바닐라 아이스 프로젝트 The Vanila Ice Project'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은 밀레니얼 세대의 주택 소유, 임대료 없는 생활을 위한 '하우스 해킹'이라는 주제로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집안의 옷장 개조, 욕실 업그레이등 바닐라 아이스의 시원시원한 성격을 잘 담아 자신만의 매력을 담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쇼의 성공으로 부동산 투자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교육 과정을 시작하기도 했다.
바닐라 아이스 프로젝트의 첫 번째 시즌은 텔리상, 팩추얼 엔터테인먼트상, 에르메스 플래티넘 프레스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캐이블 팩스상 최종 후보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만큼 시창자들의 공감을 끌어낸 방송이었다.
그는 전문 제트 스키 선수로서도 짧은 경력을 쌓았다. 또한 뛰어난 화가이며 다채롭고 추상적인 작품 그려 갤러리에 전시하기도 했다. 예술 매체에서의 창의력도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현재는 래퍼로서 여전히 활동하면서 동시에 부동산 레노베이션 전문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바닐라 아이스가 말하는 ‘성공’을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다.
Don’t make your life too serious.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만들지 말자.
Enjoy the ride.
그 과정을 즐기자.
Keep dancing.
계속 춤을 추자.
Find the passion.
열정을 찾자.
성공을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흥미롭고 즐거움으로 가득 차있다. 그의 지마온 흔적들을 보아도 다양한 시도를 하며 하늘을 치솟는 인기를 받는가 하면 저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비참함도 경험했다.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칠만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만 바라보지 말라고 말한다.
우린 너무 처절하게 삶을 잘 살려고 하다 보니 인생 그 자체를 즐길 겨를 틈도 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많은 사업가들이 사업을 하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긴커녕 그저 사방에서 받는 자극에 반응하기에만 급급하게 보내고 있는 듯하다. 돈이 항상 우선순위 1위에 위치한다. 참고 견디어 돈만 벌면 다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절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의 말처럼 춤을 출 만한 것 하나쯤은 해야 하지 않을까? 숨이 막혀오는 일상에서 가끔은 숨구멍이 트여야 지속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닐라 아이스를 만났던 2번의 기회. 특히 비즈니스 콘퍼런스에서 뵙게 되었을 때 전 세계에서 온 500여 명의 사업가들이 함께 아이스 아이스 베이비에 맞춰 방방 뛰며 마무리를 했다. 숨 가쁜 시간, 드레스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서도 멈출 수 없었다. 땀이 흘러내리면서 느꼈던 그 희열, 열정을 공유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일하더라도 콧바람은 종종 쐐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래야
엎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 테니까.
바닐라 아이스가 말하는 ‘과정을 즐기며 계속 춤을 추고 열정을 찾자’라는 말은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의미한다고 이해가 되었다. 내 인생의 앞길에 나타나는 다양한 기회들 중 목표를 향해 가는데 부합하다면 시도하고, 도전하고,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이 중요할 테다.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초초해하는 것보다 실패를
하든 성공을 하든 행동 안에서 느끼고 배우는 것 말이다.
회복 탄력성을 갖기 위해서는 엎어지더라도 다시 치고 올라올 수 있는 쿠션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도전 역시도 마찬가지다. 작은 성공들을 이루며 만족감과 충만함이 있어야만 두려움을 줄이고 ‘그래, 다시 한번 더 해보자!’하는 마음이 들 것이다. 결국 힘든 일도 지속적으로 해내고 레벨업을 하려면 일 자체를 사랑해야 한다.
바닐라 아이스는 회복탄력성과 재창조의 도전 정신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의 여정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매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전진하는 변화의 힘에 대한 증거로 보인다. 50대 후반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에 감사하며 꾸준히 해내는 모습, 그가 살아온 전척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영감이 된다.
매 단계마다 그는 인내와 혁신의 의미를 재정의하여 다른 사람들이 변화를 수용하고 위대함을 향한 길을 개척하도록 영감을 준다. 그의 삶이 시사하는 바는 단지 음악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다시 쓰고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기려는 확고한 결심을 엿볼 수 있다.
자신이 관심 있어하고 사랑하는 것에 치열하게 부딪히며 성공과 실패를 반복해도 마치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난다. 자신이 어두웠던 시간을 보내며 겪은 고통을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신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알리고 여러 자선활동에 앞선다. 자신이 어렵게 지나왔던 시간들을 감추지 않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며 그런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옹호한다. 자신의 실패와 성공을 이해하고 사회에 환원하고자 하는 철학 역시 본받을만하다.
바닐라 아이스가 행동으로 보여준 지속적인 회복탄력성 그리고 도전력은 모든 사업가에게 꼭 필요한 자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