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 꼭 가야겠니? <5>
수업을 할 때 선생과 학생 사이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계획하고 글쓰기'에 관한 문제이다. 선생은 학생에게 글을 쓰기 전에 어떤 내용으로 쓸 것인지 충분히 계획을 하고 쓰도록 지도하고, 학생들은 이를 귀찮아하며 하기 싫다고 말한다.
학교에서 하는 글짓기 수업에서도, 논술에서도, 소설창작수업에서도.
대부분이 아닌 모든 선생님들이 학생들에게 글을 쓰기 전에 계획을 짜고 쓰기를 권장한다. 어떤 주제로 글을 쓸 것이며 어떻게 시작을 하고 어떻게 끝낼 것인지. 하지만 왜 글을 계획하고 써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주는 선생님들은 많지 않다.
많은 학생들이 이런 말들을 한다.
'저는 여태까지 계획하고 글을 써본 적이 없는데 그래도 글을 잘 썼는데요?'
'결말이 바뀔 수도 있는 거잖아요. 꼭 정해놓고 써야 하나요?'
'틀에 박힌 글쓰기는 하고 싶지 않아요.'
'글을 계획하고 쓸 시간이 어딨어요. 시간 내에 맞춰 쓰는데도 시간이 부족한데.'
왜 계획을 하고 글을 써야 할까?
오늘은 그 이유에 대해 설명해볼까 한다.
문예창작과를 가기 위해 글을 쓸 때, 우리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백일장', '공모전', '대학 실기'이다. 이 셋은 학생의 글을 평가하는 일종의 시험이다.
이 시험들의 공통점은 '주어진 주제로 글을 쓸 것', '시간 내에 글을 쓸 것', '정해진 양을 쓸 것' 그리고
나는 학생들에게 이 시험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의 글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결말까지 계획하고 글을 쓰라고 늘 강조한다.
글을 쓰다 보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잊고 산으로 가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상상을 해보자. 백일장에서 주어진 글제에 맞춰 어떤 글을 쓸지 대략적인 내용만 생각을 해두고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글제에 대한 내용이 글에 잘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은 부족하고, 글은 이제 결말부만 완성하면 된다. 억지로 글제에 관한 내용을 넣으려다 보니 앞에 쓴 내용이랑 결말 부분이 어울리지도 않는다. 정해진 원고지의 분량도 넘어버렸다. 말이 안 되는 글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어져가고 있다. 이쯤 되면 학생들은 현실을 깨닫는다. '아 망했구나.'
긴 글을 쓸 때는 결말까지 계획하고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많은 인물이 나오는 소설이라면 더더욱 계획을 중요시해야 한다. 인물들의 행동에 대한 개연성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예시로 생각해 보자. 햄릿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다. 그런데 그 인물이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게 갑자기 오필리어와의 사랑을 더 중요시하거나, 복수의 대상인 작은아버지에게 연민을 품어버리게 된다면 비극이 완성될 수 있을까?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것은 어찌 보면 쉬워 보이고, 시간도 많이 안 걸리는 것 같다.
계획하고 글을 쓰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 같다.
결말까지 계획을 하고 쓴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글을 쓸 때 우리는 의식의 흐름을 지양하며 어느 정도의 계획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
세세하게 계획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저 내가 어떤 주제로 글을 쓸 것이며, 초반 중반 결말부에 어떤 내용을 쓸 것인지, 긴 소설을 쓴다면 내 소설 속 주요 인물은 누구고 어떤 사람인지, 소설 속 인물의 목표는 무엇이고 결말에서 그 목표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 대략적인 것만으로도 괜찮다.
'틀'이 있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학생들과 반대로 엄청 선호하는 학생들이 있다.
자기는 글을 써서 대학에 가고 싶고, 글을 배우고는 싶지만 '예술가'이기에 이런 틀에 자신을 맞추고 싶지 않은 학생은 그대로 3번 문항으로 건너뛰어도 괜찮다. 그게 자기 신념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3번 문항을 먼저 읽고 와서 읽을 마음이 든다면 이 문항을 다시 읽길 바란다. 시험에 맞춰 쓰인 글이라고 못쓴 글이나 나쁜 글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을 성장시키는 하나의 시련이라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 나는 틀에 맞춰 글을 쓰는 것을 선호하는 학생이었다.
예술과 글. 정답이 없는 세상이다. 열정과 노력 그리고 내 모든 재능을 쏟아부은 글이 독자에게 외면을 당할 수도 있고, 급하게 쓴 글이 좋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정답이 없는 세상 속에서 나는 늘 불안했다. 그런 내게 글을 쓰는데 하나의 지침, 하나의 틀을 누군가가 제시해 준다? 나는 막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끼며 신나게 글을 쓰는 그런 타입이었다.
'주전자'라는 글제로 2시간 내에 3000자 이내 짧은 소설을 완성하시오.
대부분의 글쓰기 시험은 이런 식이다.
내 학창 시절 나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스피드'였다.
내가 했던 글쓰기 훈련법은 백일장이나 실기에 특화된 것이었고, 덕분에 많은 백일장에서 상을 탈 수 있었다.
내가 학창 시절 늘 했던 글쓰기 훈련법은 이러하다.
10분 이내로 글을 계획한다. 거창하지 않다. 그냥 나는 빈 종이에 동그라미 네다섯 개를 이어 붙여 애벌레모양처럼 그렸다. 이 동그라미 하나가 서론, 본론, 결론이 될 때도 있고 기승전결이 될 때도 있다. 혹은 짧은 소설의 각 문단이 되기도 한다. 나는 대략적으로 그 부분에 들어갈 문장이나 내용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적어놓는다.
그다음부터는 쉽다. 그냥 바로 10분 전의 내가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위에서 대략적으로 계획해 둔 내용을 바탕으로 40분 이내로 연습장에 간단한 초고를 완성한다.
다시 10분 동안 연습장에 쓴 초고 위에 색펜으로 고치거나 첨가할 부분을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답안지에 옮겨 적는다. 그 과정 속에서 퇴고가 한 번 더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런 습관을 들이면 계획을 하거나 초고를 하는데 조금씩 시간이 더 걸린다 하더라도 3000자 글을 한 편 완성하는데 대략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나는 글을 쓰고 한 30분 정도 시험시간이 남는 것이 마음이 편하고 좋았다. 시간에 쫓기면서 촉박하게 글을 쓰다 보면 제대로 완성될 글도 망가지기 마련이다.
실기나 백일장에서 학생들이 글을 쓸 때 제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글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시간 내에 완성을 하지 못하던, 내용이 산으로 가거나 글자수가 모자라거나 넘어버려서 제대로 완성을 하지 못하던, 미완성은 절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결말까지 계획을 하고 글을 쓴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글쓰기도 예체능의 한 분야이다. 글쓰기를 마치 운동처럼 생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단거리 달리기 기록을 단축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선수처럼 우리는 자신에게 잘 맞는 훈련법을 찾아서 끊임없이 시간 내에 좋은 성과를 올리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한다. 양궁, 사격, 수영 어떤 운동도 괜찮다. 나를 하나의 선수라 생각해 본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고의 성과가 나올 수 있도록 평소에 몸과 마음을 내 목표에 맞춰 훈련해 두는 것이다. 훈련과정이 귀찮을 수도 있고, 고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된 훈련을 겪고 난 사람은 강해지기 마련이다. 글쓰기와 운동은 비슷하다. 연습을 게을리하면 그만큼 둔해지고, 열심히 공부해 두고 연습해 두면 굳은살처럼 몸에 내 노력이 새겨져서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글을 쓸 때 결말까지 계획함으로써 내 멘탈을 부여잡을 수 있었다. 세상만사 내 마음대로, 내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 없어 스트레스받는데 내 글만이라도 과정과 끝을 내 마음대로 정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내 예상대로 결과물이 나와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이건 써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Kellogg는 1988년 자신의 연구 'Attentional overload and writing performance: Effects of rough draft and outline strategies'에서 원고의 질과 계획하기의 연관성에 대해 밝혔다.
Kellogg는 개요를 작성했던 참여자들이 개요를 작성하지 않았던 참여자보다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긴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글을 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이며(계획하기 시간은 제외), 내용 수준과 전체적인 질이 더 높은 글을 썼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Carles A. MacArthur, Steve Graham & Jill Fitzgerald{Ed.}(2015), 『작문 교육 연구의 주제와 방법』, 박영민 외 옮김. 박이정. p. 67 참고 인용
꼰대 같을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내 경험상. 그리고 이론상 '의식의 흐름대로 글쓰기'는 글을 쓰는 그 당시에는 편할지는 몰라도 '결말까지 계획하고 쓰기'보다 양질의 결과물이 나오기는 힘들다. 달리기를 할 때 그냥 막 뛰는 게 편한 거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운동선수를 꿈꾸는 학생에겐 스타트 자세부터 달리는 폼까지 정확히 가르쳐줘야 하는 게 먼저 길을 나선 선생과 선배의 일 아닌가. 그저 같은 말이 몇 번이나 반복되며 강조되는 내 긴 글을 보고, 한 명이라도 계획하며 쓰는 습관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좋은 글을 쓰게 된다면.
나는 그걸로 족하다.
어떤 학생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추리문학의 대가인 히가시노 게이고는 그냥 계획 없이 무작위로 글을 써서 소설을 완성한다 했다고, 자기도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쓰고 싶다고 말이다.
나는 대답해 주었다.
학생을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사실이지 않는가. 내 학생이 히가시노 게이고보다 더 높게 평가받는 작가가 될 수도 있다. 학생이 천재 작가가 될 재목인지 아닌지 그건 내가 판단 내릴 일이 아니다.
나는 그저 학생들에게 좋은 습관을 들이는 법을 권장하고 학생의 목표에 맞게 글을 쓰는 법을 가르쳐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