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창작과 꼭 가야겠니? <3>
누군가 저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작가가 되기 위해 문예창작과를 꿈꾸는 학생들을 상처 주는 것들은 저런 말 한마디다.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문예창작과를 준비할 자격이 어디에 있고, 작가가 될 자격이 어디에 있는가. 세상 참 각박하다. 왜 이렇게 처음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청춘들을 짓밟는지. 자기들은 뭐 처음부터 다 알았나?
사실 나도 어릴 때는 '글제' 뜻이 정확히 뭔지 몰랐다. 그냥 백일장에서 '글제에 맞춰 글 쓰세요.'라고 하니까 글의 소재나 주제정도로만 생각했을 뿐이지. 나도 그랬다. 어릴 때 몰랐는데도 글 잘 쓰고, 대학 가고, 잘 크더라.
모르면 찾아보면 되는 거고 배우면 되는 거다.
'글제'
이제부터 글의 제목의 약자라고 지금부터라도 쉽게 기억해 두자.
어려운 거 없다. 오늘 글에서는 저 단어 뜻 하나만 알면 다 이해가 가능하다.
내가 오늘 글에서 이야기할 것은 바로 단어 글제에 관한 이야기다.
내 첫 수업은 언제나 단어 글제로부터 시작된다.
'빨강'
학생에게 질문을 한다.
이 단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지?
사실 이건 학생들이 많은 학원이나 학교에서 더 좋은 효과를 보이는 수업이긴 하다.
칠판에다가 '빨강' 글자 딱 적어놓고, 앞에 있는 학생부터 빨강 하면 생각나는 단어나 문장이나 이야깃거리 아무거나 말해보라 한다.
생각보다 다양한 얘기들이 나온다.
토마토, 사과, 신호등, 소방차, 피, 파워레인저, 색연필, 장미꽃, 빨간 머리 앤
그러면 나는 다시 질문한다.
토마토에 관련된 기억이 있니?
신호등과 소방차에서 빨간색은 무슨 의미지?
왜 파워레인저 대장은 빨간색일까?
빨간색연필은 언제 쓰이지?
빨간 머리 앤은 왜 자기 머리색을 싫어했지?
그러면 토마토를 못 먹는 학생은 자신이 못 먹게 된 이유를 찾아본다.
왜 빨간색은 경고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다 같이 이야기해 보며 생각해 본다.
왜 무지개의 첫 번째 색은 빨강이고, 꼭 우두머리 캐릭터는 빨간색을 가지고 있는지.
왜 선생님들이 꼭 채점할 때 빨간색을 쓸까?
동화 빨간 머리 앤의 시대적 배경은 어디였으며 그 당시 빨간 머리는 어떤 차별을 받았는지.
나는 최대한 학생의 생각을 듣고, 자신만의 이야기가 나올 수 있도록 말을 건넨다.
그러다 보면 학생들의 생각이 점점 완성된 가는 것이 보인다.
토마토를 싫어하는 학생이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토마토를 맛봐야 하는 이야기라던가.
사이렌이나 모든 경고의 의미가 파란색으로 바뀌어버린 세상 속의 빨간 물건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대장이 되고 싶어서 언제나 빨간색 옷을 입고 다니는데 사실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는 아이의 이야기라던가.
학생들에게선 내가 상상한 것보다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나온다. 나는 매년 이 순간마다 놀라곤 한다. 인간의 상상력이란 참 얼마나 멋있는 것인지.
여러 가지 사정으로 1대 1 수업을 해야 하는 학생과 함께 할 때는 내 역할이 더 커진다.
선생님이 학생일 때는 '빨강'이라는 글제로 이런 글을 썼단다.
예전에 네 선배 중 한 명은 이런 말을 했었어.
나는 마치 다중인격처럼 여러 사람의 목소리로 말을 하며 학생의 상상력을 넓혀준다.
가장 중요한 건 학생이 안정을 느끼는 편안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안에 있는 이야깃거리를 꺼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백일장에서 늘 등장하는 것이 단어 글제다. 대학에서 인정을 받는 백일장에서 3등 이내의 상을 타면 문예특기자 전형으로 대학 입시를 치를 수 있다.
대학교 문예창작과 실기에서도 단어 글제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단어 글제에 익숙해져야 한다.
현실만 있다면 세상 살기 참 팍팍할 것이다.
퍽퍽한 닭가슴살만 먹으면서 다이어트를 하다 보면 기름기 도는 닭다리를 먹기 욕망하게 되는 것처럼.
'글제도 모르면서 무슨 글을 써?'라는 퍽퍽한 현실적인 말을 듣기보단 내가 글을 쓰는데 좀 더 낭만적인 말을 들어야 세상 좀 살만해진다.
단어 글제와 친해져야 하는 이유를 낭만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단어 글제를 쓰다 보면 내 안에 있는 다양한 소재와 이야깃거리들을 알 수 있게 된다.
짧은 단어는 내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그 상상력은 이내 글이라는 '나의 세상'이 된다.
결국 단어 글제는 내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작점이 되는 것이다.
단어 글제는 글을 쓰게 된다면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과제이다.
단어에서부터 무슨 글을 쓸지 내 안의 재료를 찾는 것은 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아, 난 왜 이렇게 멍청하지. 평범한 것 밖에 생각이 안 나. 아무리 해도 무슨 글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어.'
백일장이나 대학교에서 나오는 단어 글제를 보고 이런 좌절은 하지 말자. 문예창작과를 지망하는 학생도, 작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도, 심지어 글을 생업으로 삼는 작가나 교수들에게도 글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저런 좌절 없이 '글쓰기가 세상에서 제일 쉬운걸.'이라면서 자만하는 사람들이 위험하지, 저런 좌절을 한 번쯤은 해봐야 자신의 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고 좋은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주 작은 팁을 하나 적으며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단어 글제에 맞춰 글을 써야 하는데 글을 쓰기 힘들다 하면 딱 두 가지만 같이 해보자.
1. 에이포용지 가운데 단어를 적어놓고 마인드맵을 해보자. 단어와 연관되는 이야깃거리를 최대한 많이 뽑아내자.
2. 혼자서 생각하는데 힘들다 싶으면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친구나 가족 아무나 괜찮다)과 단어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내 생각의 지평이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내 세상은 더 크고 견고해지고 아름다워질 것이다.
글은 곧 내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세상이다. 나는 언제나 내 학생들에게 말한다. 나의 세상을 어떤 의도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사람들을 위해,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어떻게 만드는지 늘 고민해야한다고 말이다.
모쪼록 내 글이 글을 쓰는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