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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히읗 Feb 29. 2024

'파묘': 영화 속 인물과 메시지

문예창작과에 꼭 가야겠니? <특별편 1> 

<주의>

영화에 관련된 내용이 글로 이루어져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는 영화를 본 다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항일에 관한 주제>


나는 제작자의 의도가 분명한 작품을 좋아한다. 

파묘에는 항일에 관한 주제와 상징들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영화이다.


장의사 고영근, 지관 김상덕, 무당 윤봉길과 이화림.

파묘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이름은 모두 독립운동가들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주인공들이 타고 다니는 차들 또한 항일과 관련이 있다.

화림과 봉길이 타고 다니는 차의 번호가 19 무 0301이었다.

이는 1919년 3월 1일 3.1 운동을 뜻하는 바가 있다.


고장로가 몰고 다니는 운구차 번호가 1945,

김상덕의 차 번호가 49파 0815라는 것을 보았을 때,

우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절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 스토리 자체가 '일본 귀신'이랑 싸우게 되는 한국 사람들이긴 하지만,

항일을 내포하고 있는 숫자들, 한국 토속 신앙, 독립운동가 이름을 가진 인물들. 

이러한 상징들이 모여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항일'이라는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는 김상덕의 번호는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연이라면서 미술팀이 신경을 좀 많이 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감독뿐만 아니라 미술팀과 음향팀의 역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 또한 한국적인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현세대를 잘 반영하고 있었다.


인물에 대한 감독의 애정과 고뇌가 '캐릭터 설정'을 통해 드러난다.


굿이나 귀신의 원한(묫바람이라던가 대물림되는 병)을 믿는 고영근은 기독교인이다. 

영화 속에서 그는 '고장로'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의 장의사 사무실에는 성경구절을 담은 현판이 걸려 있으면서 '종교 무관 환영'이라는 말이 붙어있기도 하다. 성경공부를 한다면서 찬송가를 틀어놓고 교인들과 고스톱을 치기도 하고, 일본 장군 귀신과 싸우게 되는 와중에도 '고린도전서'의 구절을 읊으며 '아멘'을 외친다. 


독실한 기독교인처럼 보이면서도 귀신에 관한 것을 직접 보고 경험함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하는 융통성이 있어 보이고, 사람들의 감정을 생각하고 험한 것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우는 그의 모습을 보며 비난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MZ세대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인물은 봉길이가 아니었을까 싶다. 

길게 기른 머리에 헤드폰을 끼고, 온몸에 '태을보신경'을 문신해서 새겨놓고, 팔짱을 끼고 눈을 지그시 감고 서있는 그의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보다 보면 이 인물이 도대체 어떤 과거를 가지고 있는지 흥미가 생긴다.

화림을 보조하는 역할과 귀신을 몸에 담는 신주 역할, 때로는 화림을 지켜주는 역할도 하는 그는 이야기에서 중요한 '인물'이자 '장치'로서 작용한다. 


영화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던 인물은 아마 화림과 상덕이 아니었을까.


흰 고무신 대신 하얀 컨버스 운동화를 신고 굿을 하고, 일이 없는 날엔 어두운 헬스클럽에서 스피닝을 배우는 무당은 보편적인 한국 무당의 모습과는 다르게 보인다. 화림은 '힙'하고 '영'한 신세대 무당이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 앞에서 기죽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말다툼을 하다 '꼰대'라고 발언을 하는 것 또한 '요즘 젊은 사람'들의 모습이다.

 

화림이 등장하는 첫 장면은 바로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이다. 그녀의 첫 대사는 일본어였다. 화림에게 일본어로 와인을 한 잔 더 하겠냐고 묻는 스튜어디스에게 일본어로 자신은 한국인이라고 대답한다. 

이 짧은 대화는 화림이 '일본어를 할 수 있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관객에게 전달해 주며, 이후에 있을 모든 사건(일본 귀신의 말을 알아듣고, 그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일본말을 하면서 대치를 하는 것)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이런 짧고 사소한 장면이 극 전체를 이끌어나가는 개연성이 된다는 것을 알아둬야 한다.


화림을 어떤 인물이라 할 수 있을까. MZ세대의 걸맞은 인물? 입체적인 인물? 


아니, 나는 지극히 한국적인 인물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악령 때문에 사람이 죽어나가는 와중에도 화림은 언제나 당당했다. 무덤 앞에서 대살굿을 하면서 칼을 제 몸에 들이밀고 얼굴에 말피를 잔뜩 묻히는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와 진짜 기 세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안에도 두려움은 존재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큰 관을 꺼내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무엇인지 모를 불확실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불당이 아닌 차 안에서 할매를 부르다 잠이 드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기가 센 무당이라기보단 겁을 느끼는 어린 소녀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에서 일본 귀신(혹은 장군 요괴라 불러야 할까)이 풀려나고, 보이는 생명체를 잔인하게 죽이며(간을 빼먹고, 목을 비틀어서 따고) 다니는 거대한 귀신 앞에서 그녀가 제일 먼저 한 행동은 납작 엎드리는 일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 아래 그녀는 두려움과 맞설 생각을 저버린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고 귀신의 신하라고 엎드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면, 나는 독립운동가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상상을 해보았을 것이다. 주변 친구들이 죽어나가고, 내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 나뿐만이 아니라 일가족이 모두 개죽음을 당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나는 당연하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을까?

글쎄다. 나는 친일이라도 안 하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두려움'에 사람은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파묘'에서 항일에 관한 메시지와 함께 따라오는 두 번째 메시지다.


극 중 일본귀신은 두려움 그 자체이다. 그 두려움에 짓눌려 화림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고, 소중한 존재였던 봉길을 잃을뻔한다. 화림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다. 경이로울 정도로 큰 두려움은 도깨비불로 형상화된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죽음(주마등)을 엿보기도 하고, 혼이 빠지고 몸이 굳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화림은 '두려움'을 확실히 형상화하였고, 그랬기에 두려움과 맞설 수 있었다. 화림은 '일본귀신'을 만났던 경험과 그에 대해 배웠던 기억들, 그리고 '도깨비놀이'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을 통해 자신이 맞서야 하는 두려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봉길을 지킬 수 있었다.


무덤터에서 귀신을 끌어내고자 귀신이 좋아하는 은어로 유인을 하고, 주목 뒤에서 한국 귀신을 연기하며 일본 귀신의 발을 묶어놓고자 하지만, 두려움이 한 번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두려움과 맞서서 한 번에 이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녀는 열심히 맞서려고 하였다. 처음 그 일본귀신을 만났을 때는 그에게 복종하는 태도로 엎드려서 있었지만, 그와 당당하게 말을 한다.


'여기는 이제 고요한 땅입니다. 더 이상 당신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자신의 앞에서 두려움을 쫓아내기 위해 화림이 했던 말은 어찌 보면 일제강점기를 지나 이곳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이 해야 할 말이다. 


이 말을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당당하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그녀는 눈앞에 나타난 두려움 앞에서 다시 주저앉고 만다. 그렇지만 이내 다시 일어난다. 자신을 돌봐주는 조상신이 있었고, 자신이 지켜야 하는 존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녀는 살아간다. 상덕을 구하기 위해 말피를 가져오기도 하고, 살아남아 병실에서 빵을 먹기도 하고, 자신의 일인 굿을 하면서 '두려움'을 떠올리며 몸서리치다가도 다시 살아간다. 


상덕은 어떠한가. 그는 이 영화의 주인공이자 제작자의 메시지를 여과 없이 그대로 전달해 주는 역할이다. 

땅을 보러 다니는 그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이다. 


악지 중에 악지라는 그 묘지터에서 이장을 하는 일을 맡게 된 것도 '죽을 위기에 놓인 아기'를 불쌍히 여겨서였다. 동티가 나서 다 죽어가는 동료를 위해 악지로 다시 가서 죽은 요괴를 가져와 치성을 드리기도 하고, '여우(일본)'가 끊어놓은 '범(한국)의 허리'를 고치고자 목숨을 걸고 귀신에 맞서는 것 또한 상덕이었다. 


화림보다 나이가 많은 그는 어찌 보면 '연륜'과 '경험'이 더 있었고, 그만큼 두려움을 많이 만나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에게는 확실한 목표이자 신념이 있었다. '땅'과 함께 살아왔던 그에게 있어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자신이 죽은 다음 살아갈 '후세대'를 위한 애정이 담긴 강한 목표였다. 죽음을 앞에 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귀신에게 붙잡혀 있는 동지들을 구하고자 한다. 고통 속에서 그가 떠올린 것은 평생 자신과 함께 해왔던 '음양오행'사상이었다. 


'물은 불을 이기고, 젖은 나무는 쇠보다 질기다.'


몸에 칼을 박아 넣고 수직으로 세워져 있던 일본 귀신은 한반도의 척추에 박힌 '쇠'다.

도깨비불로 변하여 사람들을 홀리는 그 귀신은 '불'이기도 하다.

이 험한 존재는 영화 속에서 '불타는 쇠'로 등장한다.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들을 고문할 때나 쓰던 불에 달군 쇠. 그런 공포스러운 존재가 바로 이 귀신이다.


상덕은 그 귀신에게 배를 찢기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평생 자신이 공부해 온 것을 떠올린다. 

쇠를 이기는 것은 나무. 불을 이기는 것은 물. 

그는 피(물)를 나무(과거 철혈단이 남기고 갔던 것)에 묻혀 불에 달군 쇠(귀신)를 밴다.

쇠말뚝에도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고, 그러기에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을 주었던 귀신은 피에 젖은 몽둥이에 맥없이 쓰러진다.  


상덕은 자식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죽을 위기에서 살아남고, 피가 이어지지 않은 동지들을 가족이라 부르며(결혼식 가족사진에 초대하며), 계속 일을 이어가며 살아가지만 그의 옷 위로 피가 배어 나오는 장면을 통해 상처가 아직 다 낫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화림과 상덕은 이런 두려움과 흔적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인물이다.


화림과 상덕은 다른 세대의 사람이지만 현재 한국에서 과거 역사를 기억하며 살아가는 '한국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두려움이란 것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때 그들이 남겼던 상처와 흔적들이 다 없어졌는가? 

아니다. 아직까지 그 흔적들은 사람으로, 물건으로, 땅으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흔적 속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땅이라면서 영근과 화림을 설득하는 상덕의 대사는 어찌 보면 너무 유치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고, 아무도 못 이기고 두려움의 화신으로 존재하던 일본 귀신을 상덕이 한 번에 무찌르는 것이 급하고 억지스러운 엔딩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감독은 인물의 성격, 말, 행동을 통해 미리 개연성을 부여해 놨다. 

상덕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고(그렇지만 조금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은 개인차가 있을 듯싶다), 음양오행과 풍수지리를 잘 알고 있던 그가 일본 귀신을 이기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엔딩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작자의 메시지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개연성 있게 이어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에는 색다른 시도가 많긴 했다. 

1. 음양오행

2. 이름 없는 묘

3. 혼령

4. 동티

5. 도깨비불

6. 쇠말뚝

이런 식으로 단원을 나눈 것도 신선한 시도였고, 중간부에서 장르를 갑작스럽게 바꾸는 시도도 이전 영화들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긴 했다.


악귀에 대한 이야기에서 갑자기 다른 형태의 괴물이 등장하며 '항일메시지'를 확실하게 강조하는 시도가 호불호가 많이 갈리긴 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의 메시지가 확실하게 이어지는 것이 좋게 보였다. 


나는 영화를 보는 창작자들이 영화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을 볼 때마다 두근거림을 느끼곤 한다. 나와 같은 의견도 좋고, 다른 의견도 좋다. 그냥 영화를 비난하며 싸우는 것도 좋고, 감독과 배우를 맹목적으로 사랑하여 온갖 찬사를 늘어트리는 것도 좋다. 의견이 있다는 것은 자신이 영화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영화를 자세히 봤다는 것이고,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며 영화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내 글을 읽는 창작자들, 혹은 영화를 재미있게 봤던 사람들이 이 글을 즐겁게 보았으면 좋겠다. 내 생각에 공감을 하여도 좋고, 반대를 생각하여도 좋고, 색다른 생각을 떠올리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다. 


창작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아 영화나 책 혹은 글과 같은 작품을 만든다. 창작자와 독자(관객)는 직접 만날 기회가 없더라도 '작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대화를 하게 된다.


좋은 작품은 독자에게 창작자의 메시지를 잘 전달하게 되며, 이후에도 많은 대화를 만들어낸다. 작품을 본 사람들끼리 나누게 되는 대화가 그러하다. 사람 사이의 좋은 대화가 이루어지면 곧 창의적인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의 지평을 무한히 넓힐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나는 이러한 과정을 볼 때마다 희망을 품게 된다. 내가 살아가면서 더 많은 좋은 이야기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말이다.  


생각보다 글이 많이 길어져 이후 분석은 다음 연재분에서 이어가야겠다. 내가 영화를 재미있게 본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유쾌한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이전 15화 영화 '파묘'에 관한 글을 적기 전에 쓰는 잡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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