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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히읗 Mar 21. 2024

누군가가 만든 세상과 마주하였을 때 지켜야 할 예의

문예창작과 꼭 가야겠니? <14화>

내 학생들이 글을 쓸 때, 나는 최대한 학생들의 선택을 존중해 준다.

무엇을 쓰든, 무엇을 하든 되도록이면 내버려 두는 편이다.


나를 가르쳤던 선생님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 그런 편이었다.

이상한 소재를 가지고 글을 써도, 갑자기 슬럼프나 사춘기가 와서 엇나가는 행동을 해도, 다 용인해 주고 긍정적인 피드백만 해주셨다.

 

어떤 면에서 보면 '방목주의'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나랑 내 친구들은 그 선생님을 존경하고 사랑했다. 

선생님이 언제나 나를 애정해주고 있으며, 내 글을 지지해 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나와 내 글, 나의 세계를 존중해 주었고, 그 가르침은 내가 글을 쓰는데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힘이 되어주었다.

짧은 시간 동안 만났던 선생님이지만, 지금은 이름도 기억이 나지 않는 분이지만, 예술고등학교에 편입하고 나서 상처를 받고 힘이 들었을 때도 그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꿋꿋하게 이겨낼 수 있었다.



세대가 바뀌었고, 내가 선생님의 입장에서 아이들과 만나게 되면서

나 또한 나만의 '방목주의'로 학생들과 수업을 진행하지만, 그 와중에 딱 하나 엄격하게 가르치는 것이 있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춰야 한다는 것.'


그냥 시정잡배들이 하는 막싸움이랑 프로 선수들이 하는 격투기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서로에 대한 존중과 예의'가 있냐 없냐는 것이다.


글도 그렇다.

혼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서 일기만 쓸 것이라면 마음대로 살아도 상관없다.

그렇지만 내 글을 인터넷 커뮤니티에라도 올려 한 명의 독자라도 얻게 된다면,

혹은 같은 길을 걷는 동료들을 만나서 소통을 하고, 프로를 꿈꾸게 된다면,

우리는 최소한의 예의를 알고 갖춰야 한다.


글을 쓰는데 필요한 예의란 무엇일까?

'남의 세계를 무너트리지 않는 것'과 '내 세계를 지키는 것'이다.


작가는 창조자가 되어 소설이나 시와 같은 문학세계를 만들기도 하고, 나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절실하게 녹여내는 에세이를 쓰기도 한다. 글은 곧 자기 자신이 만들어내거나,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하나의 세계인 것이다. 

 

누군가 자기 자신에게 갑자기 욕을 한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분이 나쁠 것이다.


열심히 쓴 글을 보고 누군가가 부정적인 피드백을 한다면 작가는 생각보다 큰 상처를 받게 된다.

자기가 여태까지 해온 노력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

자기가 사랑하는 가족, 혹은 자식이 욕을 먹은 기분도 들고,

나 자체를 깎아내리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타인은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읽고 무심하게 말을 던졌을 뿐인데,

글을 쓰는 작가는 한 동안 혹은 영원토록 글을 쓰지 못하게 될 정도로 충격을 받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것을 학창 시절 친구들과 합평을 하면서, 그리고 대학원에서 웹소설 댓글 연구를 하면서 절실하게 느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예술고등학교에 편입해서 겪은 첫 합평은 정말 최악이었다.


나에 대해 안 좋은 헛소문이 돌고 있었고,

나보다 반년 먼저 학교 생활을 한 친구들은 내게 굉장히 배타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수업시간에 단편소설을 발표한 날,

그때 같은 반 친구들이 내게 했던 말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B급도 아니고 C급도 못 되는 소설.'


'변기에 내려버려야 하는 소설.'


'쓰레기.'


'읽은 우리 시간이 아깝고, 종이가 아깝다.'


어떤 아이는 인쇄된 내 소설을 그대로 들고 쓰레기통 앞으로 가서 찢기까지 했다.

나중에 내가 학교 생활에 적응된 다음에는 그냥 편입생이고 하니까 기를 잡으려고, 이쪽 세계가 어떤지 교육을 시키려고 했다는 해명과 함께 사과를 듣기도 했지만.


1학년 내내 이름 대신 '편입'이라고 불리면서 매 합평시간마다 덜덜 떨었던 나로서는 사과를 받기 전까지의 그 시간이 굉장히 고통스러웠다.


요즘도 글을 가르치는 선생들 중에서는 '충격요법'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건너 건너 듣게 된다.

학생에게 강한 마음을 갖게 하기 위해, 어디서도 지지 않는 실력을 만들어주기 위해, 나도 그렇게 배웠으니까 라는 이유로 폭력에 가까운 합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겪어본 바로는 이런 폭력적인 발언들은 작가에게 피드백이 되지 않고 상처가 되기 마련이다.


글쓰기 교육을 연구하기 위해 대학원 입학을 결정했고, 내가 대학원 연구 주제로 결정했던 것은 '웹소설 댓글 연구'였다. 


다른 문학작품들과 웹소설의 차이가 있다면 인터넷을 통해 독자의 피드백을 '댓글'이라는 형태로 작가가 빠르게 받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댓글을 통해 작가들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글을 쓰는데 영향을 받게 된다.


댓글 연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작가를 죽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었다.


같은 글을 쓰는 작가로서 다른 작가를 질투하여서, 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악플을 쓰고,

자신은 작품에 애정을 갖는 논리적인 '비평가'라고 하며 악플을 쓰기도 하고,

자기 취향이랑 다른 내용을 쓴다는 이유로, 혹은 자기가 좋아하는 작가랑 소재가 겹친다는 이유로.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이유로 악플이 쓰인다.


그들이 악플을 쓰는 목적은 같다.

작가를 자기 아래에 두고 작품을, 그 작가의 세계를 마음대로 휘두르다 망가트리고 싶은 것이다.


이런 폭력에 익숙해지라고,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라면서 비평이 아닌 비난을 작품과 작가를 향해 내뱉고, 폭력을 행하는 같은 창작자(혹은 교수자)들을 나는 정말로 싫어한다. 


재밌게도, 가해자는 자신이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인 것을 평생 모르고 이걸 당연한 애정이자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필요한 행동이라 생각하고 변하지를 않는다.


반면, 피해자는 둘 중 하나다. 글을 평생 못쓰게 되거나. 슬럼프에 빠지기도 하고, 자책을 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무너졌다 다시 일어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상처를 받아가면서도 이겨내려 노력하며 꿋꿋하게 글을 쓰게 되거나.


내 글을 지키기 위해, 상대방의 글을 대하는 예의를 배울 필요가 있다. 

예의를 알고 행하는 쪽이 상대에게도 존중을 받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 무례의 범위 또한 알 수 있기에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낮아진다.


글을 쓰는 사람들도 똑같은 사람들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다 똑같다.

예의를 차리고, 상처를 입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글을 써가는 사람에게 더 좋은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만든 세상인 글과 마주하였을 때, 그 세상이 아름다워 질투가 나기도 하고, 너무 못나보여 욕을 하고 싶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예의를 지켜야 한다.


그 예의는 곧 내 세계를 무너트리지 않을 자존감이 될 것이고, 남이 내 세계를 무너트리지 않게 되는 자존심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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