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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히읗 Mar 07. 2024

'파묘': 영화에 나오는 상징에 관하여

문예창작과에 꼭 가야겠니? <특별편 2>

<주의>

영화에 관련된 내용이 글로 이루어져 있으니,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들께서는 영화를 본 다음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파묘 속 빛과 그림자-음과 양의 세계>


사람에게 첫인상이 있듯이, 색깔이 전달하는 이미지가 있다. 색깔이 전달하는 이미지를 예로 들자면, 소나기에 나오는 '보라색 꽃'이 소녀의 죽음을 암시한다고 학창 시절에 배운 것과 같은 것이다. 


각가의 색은 다양한 상징들을 내포하고 있다.

불이랑 피와 같은 색인 '빨강'은 위험에 대한 경고나 정열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풀과 자연을 닮은 '초록'은 안전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 세계 신호등은 경고를 의미하는 빨강과 안전을 의미하는 녹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글을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색깔을 통해 단순하게 그 의미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함이다. 


영화 '파묘'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색은 검정과 하양이다.

검정이 보편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죽음', '어둠', '고통', '불안', '공포' 등이다.

하양이 의미하는 것은 '빛', '삶(생)', '정화', '안정', '순수' 등이 있다.


영화에서 검정은 '어둠', '그림자', '죽음', '음'으로 나타나며,

하양은 반대로 ' 빛'과 '삶', '양'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영화에 '검정'색이 나타날 때마다 본능적으로 '죽음'과 맞닥뜨리게 되고 '공포'를 느끼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것은 '영화 속 배경-집의 인테리어'와 '인물들의 복장'이다. 


영화의 첫 단원 '음양오행'에서 무당 화림은 미국에 있는 의뢰인 집으로 향한다. 그녀는 집 안을 살피며 '음과 양의 세계'에 대해 언급한다. 그림자 뒤에 숨어 있던 요괴 모양의 장식품을 빛 아래로 꺼내며, 간혹 '도깨비', '요괴'라고 불리면서 음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삿된 것들이 반칙을 써서 사람들이 사는 양의 세계로 넘어온다는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이후 있을 공포를 상상하게 된다. 그림자 속에서 나오는 석상을 보며 무언가 사람이 아닌 것이 등장하겠구나 하는 공포를 말이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의뢰인의 집은 어두운 편이다. 여기에서 나는 미술감독의 무대 연출이 아주 잘 되었다고 생각한다. 집 안에는 잎과 꽃이 없는 나무들이 가득하다. 벽지에도, 심지어 화분에도 가지가 앙상한 나무만 존재한다. 벽지와 바닥, 그리고 가구들은 검거나 하얗다. 이 삭막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며 죽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검정을 몸에 두르고 있다. 


영화 속에서 묫바람이라는 일종의 저주를 받은 이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갓난아기인 아들이다. 영화를 보다 보면 신기한 점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얼굴에는 조명의 빛이 닿지 않는다. 언제나 그들은 그림자 속에 있으며, 빛을 등지고 있거나 빛 바로 아래 있어도 얼굴에 빛이 담기지 않는다. 그들의 얼굴은 언제나 그림자가 져 있다. 반면, 같이 저주를 받고 있어도 아기의 모습은 다르다. 아기의 얼굴은 언제나 빛이 나고 있다. 또한, 아기와 함께 있는 아이의 엄마(며느리)의 얼굴도 언제나 빛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죽겠지만 아기는 죽지 않겠구나, 간신히 살아남겠구나 하고 무의식적으로 안심을 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무당인 화림과 봉길은 언제나 검은색(혹은 검정에 준하는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있다. 무당은 결국 '음'의 세계와 연결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죽음과 위험, 그 공포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 


무당인 두 사람 외에도 검은 옷은 영화 전반에 등장한다. '상복'이다.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혹은 죽음의 가까이에 서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죽음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자 몸에 죽음의 색을 두른다. 


작품에 꼭 상징을 넣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작품을 어떻게 쓰는지는 창작자의 자유다. 그렇지만 상징과 그 의미를 고민하면서 작품을 만들면 독자의 흥미와 집중을 유발할 수 있으며, 더 다채로운 느낌을 줄 수 있다.


죽음과 공포는 검정이라는 보편적인 상징을 써야 하는가? 꼭 그럴 필요는 없다.

빛 아래에서도, 온통 하얗고 푸른색 투성이에서도 충분한 공포를 이끌어낼 수 있다(예: 미드소마). 


재미있지 않은가? 조명 하나로 사람들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고, 옷 하나로 이 사람의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고, 각기 다르게 보이는 색깔로 이야기에 대한 깊이를 줄 수 있다는 게 말이다.


다양한 색깔이 있는 만큼, 이야기 속에서 '색'은 여러 가지 인상을 주고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징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낼 수 있다는 것은 창작자의 좋은 기술이라 생각한다. 



<나무와 불 그리고 흙>


색깔처럼 자연에서 비롯된 상징과 의미 또한 존재한다.

예로부터 서양은 물, 불, 공기(바람), 흙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양은 불, 물, 나무, 쇠, 흙. 오행이 세상을 이루고 있다 생각했다.


영화는 '음양오행'사상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오행을 이루는 자연적 요소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자연적 요소는 바로 '나무'다. 그중에서도 '잎이 없는 나무'들이다. 


잎이 있는 푸르른 나무들은 '생명'을 의미하지만, 잎이 없는 나무들은 황폐함과 '죽음'을 보여준다.

병이 들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집안에는 잎이 없고 앙상한 나무들이 가득하다.

영화에서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나오는 나무들 또한 잎이 없고 마르고 음산한 느낌을 주며, 이는 곧 또 다른 공포의 장면들로 연결이 된다.


화림이 산에 올라가며 제일 먼저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커다란 주목이다. 잎이 하나 없는 그 나무를 기억해 둔 화림은 나중에 그 고목에 든 정령을 연기하며 오니와 소통을 하게 된다(오니와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것에서 이미 생명을 가진 인간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일본 오니와 한국 귀신과는 다른 존재이기에 대화하는 방식 또한 다르다. 화림은 과거 일본 귀신과 소통하는 스승의 모습을 본 적이 있기에 인간과 귀신이 아니라 정령과 정령으로서 대화를 해야 한다는 방안을 생각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황폐하고 마른나무는 불에 타기 쉽다. 죽음이 드리워진 나무들은 불에 잡아먹힌다.

도깨비불(오니)은 삿되고 험하고, 나무를 태울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지만 물은 불을 이기는 법이다. 물은 언제나 생명을 의미한다. 사람은 물 없이 살 수 없으며 물(양수)에서 태어나서 물(피)과 함께 살아간다. 잎이 없는 고목도 죽지만 않았다면 물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영화 속에서 적대적인 존재인 '일본 오니'는 '쇠'와 '불'을 상징한다.

불타는 쇠인 오니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곳이며 지켜야 하는 곳인 '땅(흙)'을 침범한다. 흙을 노리며 존재하는 그 오니는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존재이다.


상덕은 나무인 삽자루에 피(물이자 자신의 생명)를 입혀 불타는 쇠를 이긴다. 자신과 자손들이 살아갈, 그렇기에 자기가 지켜야 하는 흙을 위해 희생을 감내하며 싸운다. 그렇게 우리는 땅 위에서 땅의 기운을 방해하던 쇠를 없애 버린다. 


흙(땅)에서 모든 문제가 생겨났지만, 우리는 우리들이 가진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한다. 땅 위에서, 땅을 위해서 말이다. 


번복하지만, 동양사상을 다룬 이 영화에서 주가 되는 것은 '음양오행'이다. 이 영화에서 좋았던 점이 있다면 '오행'을 영화 속에 잘 녹아들게 한 것이었다. 나무를 통해서 공포와 두려움을 보여주고,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서 살다 땅에서 죽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땅을 빼앗겼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땅을 위협하는 존재(불이자 땅에 박힌 쇠)와 그에게서부터 땅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흘리는 피(물이자 생명)를, 잘 표현해 낸 것이 좋았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에는 그래도 잎이나 꽃이 드리운 나무가 한 번쯤은 나오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좋을 것 같다. 이 또한 희망적인 메시지가 되니까 말이다.   


인문계 학교에서는 시험이 끝나거나, 방학 전에 수업과정을 모두 끝마쳤을 때나 교실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수학시간에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보았고, 음악시간에는 '아마데우스'를 보았다. 학교에서 영화는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었고, 때로는 선생님이 똑같은 영화를 또 보여줄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교과서 대신 영화를 보는 시간은 즐거웠다. 


예술고등학교 문예창작과에서는 영화를 자주 보았다. 영화를 보는 것 또한 공부였다. 이름도 기억 못 하고 내용도 난해한 프랑스 영화도 보았고, '타인의 삶'이라거나 '시'와 같은 영화도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보았다. 수업시간에 자주 보게 되는 영화는 굉장히 어려웠고, 지루할 때도 있었지만 선생님과 친구들과 영화를 이야기하는 시간은 즐거웠다.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계태엽 오렌지'라던가 '인셉션' 같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들을 찾아보았고 친구들에게 추천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같은 영화를 보고, 혹은 각기 다른 영화를 보고 말이다.


나와 같은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나는 학생들에게 많은 영화들을 추천해 줬다. 나른한 봄날이나 여름방학 직전의 들떠서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을 하지 못할 때면 같이 영화를 보자고 이야기했다. 내가 본 영화들 중에서 학생들의 취향에 맞을 만한 것을 추천해 주면,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본 학생들이 영화에 대해서 한참 동안 제 감상을 이야기하다 이내 내게 새로운 영화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영화를 학생들과 같이 보며 나는 그 시절을 추억하기도 했고, 학생의 새로운 시각을 발견하며 설레기도 했다. 


글을 쓰고 배우다가, 영화를 보고 공부한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주위가 환기되는 것을 느낄 수 있고, 새로운 시각을 배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말 즐거운 기억이 된다는 것이다.


문예창작과 입시에 관련된 에세이를 쓰다가 최근에 나온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그저 나 혼자의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과거 내 학생들을 떠올리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영화를 보고 하는 수업에는 학생들의 눈빛이 대번 달라졌다. 매번 소설과 시를 읽고, 흰 종이에 글만 쓸 때랑은 다른 기분이라는 것을 나도 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나와 함께 즐겁게 영화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던 그 학생들은 이 영화를 보았을까. 보았다면 나랑 또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이제는 사회인이 되어 나보다도 더 어른 같이 살아가는 아이들이 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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