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해소제를 사는 마음

by 젠또

​"지금의 이 고통이 나중에 나를 얼마나 더 단단하게 만들지 그런 건 궁금하지 않아. 다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나를 좀 더 예뻐해 줬으면 좋겠어." -《멜로가 체질》











내 달력에는 표시되지 않은 이별이었다.

언제 헤어진 건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체감상으로는 한 달쯤? 달력에는 표시되지 않은 이별이었다.

3년 가까이 함께했던 이 사람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달리, 생각보다 잘 지냈다.

'이렇게 지내는 게, 이런 모습이 나였지. 나를 위한 시간이란 이런 거였지'

잃어버린 정체성을 되찾은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러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외로움과 고독함이 천천히 내 일상을 감쌌다. 자유는 여전했지만, 그 자유를 함께 나눌 대상이 없다는 사실이 뒤늦게 몸으로 왔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소개팅이라는 도파민에 관심을 두게 됐다.

마침 30대 초반, 부유한, 카페 사장님이라는 소개팅 제의가 들어왔다. 얼핏 듣기로는 넉넉하다 못해 풍족한 가정환경이라는..


순간 불안했다. 내가 가진 결핍 중 하나가 바로 ‘돈’이고, 나는 지금 매우 외로운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나의 약해진 판단력을 욕망했다.


외로움은 때때로 욕망의 주체를 바꿔치기한다.

다행히도 소개팅 약속은 생각보다 미뤄졌고, 그 사이 나는 조금씩 사고 기능을 회복하고 있었다. 돈이 충분했다면 이 선택을 거절했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다양한 사람을 경험해 본다는 정도로 받아들였을까. 아마 선택 자체는 비슷했을 것이다. 다만 훨씬 자신 있었을 것 같다.

돈은 선택을 바꾸지 않았지만, 선택하는 자세를 바꿨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진 결핍 그 자체와 나에게 집중하곤 한다. 도망치지 않기 위해, 미화하지 않기 위해, 급히 메우지 않기 위해.

돈에 대한 결핍은 예상보다 다양한 얼굴로 다가온다. 사람의 조건적인 형태로, 저축에 대한 집착적인 형태로, 현재를 잃고 미래만을 사는 태도로. 우리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매 순간 다가오는 위험과 막연함 앞에서 교만한 자세는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려는, 신의 영역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의 끝에서 결국 내가 붙잡는 것 중 하나는 자기 객관화다. 하지만 이 객관화 역시 완전히 성숙해서라기보다는, 위기 속에서 작동한 본능일지도 모른다. 문제 안에 있을 때에만 이유가 생기는 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번이고 내 안에서 부서지며 나를 들여다본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고통의 신음마저도 기록해두고 싶어진다.

여전히 참 외롭다.


현대사회의 공허함과 고독을 내가 다 안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밤, 몇 년 만에 내 돈으로 사지 않았던 술 한 병을 편의점에서 사 왔다. 이 와중에 숙취 해소제를 함께 집어 드는 나를 보며, 아직은 나를 사랑할 정신을 붙들고 있구나 싶었다.

5도짜리 술을 홀짝이며 영상을 틀어놓고 나를 기록한다. 영상은 흘러가는데, 대답해야 할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보면 속상해할까 봐, 친구들은 각자의 삶이 있으니까. 교회를 다니는 내가 술 마시고 취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나 자신까지.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제외한 모든 이유로 혼자가 된다.

이 와중에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이, 3년을 만난 연인과 헤어지고 한 달쯤 지나 찾아온 이 고독함뿐이라니. 어쩌면 감사한 시간일지도 모르겠다고, 한숨 돌리는 나를 보며 웃음이 났다. 이런 내가 조금 우스러워서, 그래서 웃을 수 있다는 게 고마웠다.

나를 사랑할 정신이란 거창한 결심이 아니었다.
히피펌을 하고 싶으면 이유를 묻지 않고 해 버리는 것, 지금 내 마음이 어떤지 가장 먼저 묻는 것, 내가 나를 너무 미워하지 않는 것. 그 과정에서 찾아오는 편안함과 기쁨을 외면하지 않는 태도였다.

후회 가득한 인생 안에서 이런저런 선택을 하며 살아내는 지금의 내가, 그래서 조금 웃기고, 그래서 감사하다.

작가의 이전글결핍에 의해 모으는 돈의 위험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