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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봉샘 Jan 06. 2020

[명작산책 123] 사랑은 가도 예술은 남는 것..

- 르느와르 <우산>

[명작산책 123] 사랑은 가도 예술은 남는 것..

르느와르 <우산>

지금도 마찬가지이겠지만 19세기 화가들 주위에는 수많은 모델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화가들과의 관계는 모델 이상인 경우가 많았다. 피카소와 같이 모델이 단순한 모델이 아니라 그의 뮤즈가 되어 그의 화풍을 바꾸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 사람 중의 또 다른 화가가 르느와르이다. 르느와르의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즐거운 모습을 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5000점이 넘는 유화작품을 남겼지만, 단 한 점도 슬픈 그림이 없는 유일한 작가라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세상에는 어둡고 추악한 일들도 많은데, 굳이 나까지 아름답지 못한 것을 하나 더 추가시킬 필요가 있는가?”


첫번째 뮤즈 리즈 트레오를 모델로 한 <산책> (1870)

재봉사였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손재주를 가지고 있던 르느와르의 고향은 유명한 도자기 산지였다. 그는 이린 시절부터 도자기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예술적인 재능까지 습득하게 되나 기계가 발명되어 도자기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그도 일자리를 잃게 된다.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르느와르는 파리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교육이 도움이 안된다는 걸 알게 되면서 2년만에 중퇴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훗날 함께 인상파 화가가 될 모네, 시슬레, 바지유 등을 알게 된다. 특히 부자집 아들이었던 바지유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 없이 그림을 그리던 그는 1870년 보불전쟁이 벌여지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된다.


바지유는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하였고, 모네는 영국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파리로 돌아왔지만, 그의 모델이자 첫 번째 연인이었던 리즈 트레오는 그의 아이를 둘이나 낳았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하면서 그의 곁을 떠나버렸다. 친구와 연인을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르느와르가 마음 둘 곳은 그림밖에 없었지만, 그해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 또 낙선하면서 공식화단과는 절연하고 낙향을 해버린다.


두번째 뮤즈 마르고를 그린 작품 <햇빛 속에서>

1874년 파리로 돌아온 모네가 예술가 협동조합을 만들면서 르느와르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해 제 1회 인상파 전에 모네, 드가, 피사로, 시슬레 등과 함께 참여하면서 평단의 혹평을 받는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원하던 중개상들에 의해 오히려 그들의 그림은 호감의 대상이 되면서, 인상파는 성공을 거두게 되고 르느와르의 형편도 좋아진다.


그러던 중 르느와르는 두 번째 여인을 만난다. 몽마르트르 출신의 여인 마르고를 만나면서 그녀는 그의 뮤즈가 되었다. 대다수의 인상파 화가들이 햇빛 속의 대자연을 그렸던데 비하여, 빛의 효과를 강조한 인물화를 주로 그렸던 르느와르에게는 모델이 특히 더 필요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몇 년뒤 장티푸스에 걸려 그를 떠나게 된다.


세번째 뮤즈이자 르느와르의 부인인 <에린 샤르고의 초상> (1885)

정을 나누던 연인을 떠나보낸 그의 외로움은 그리움으로 발전하던 중, 40이 다되어 세 번째 여인을 만나게 된다. 그 때 그는 센강변의 식당에서 일하던 알린 샤리고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겨우 19살연하의 방년 20세였다. 결혼하겠다는 그녀가 부담스러웠던 르느와르는 알제리로 훌쩍 떠나 버리며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가 파리역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서있게 되면서 그날부터 그들은 동거에 들어갔고, 이태리 여행을 함께 하면서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에 경탄을 하며 르네상스 미술을 배우게 된다.


네번째 뮤즈 수낮 발라동을 그린 <부지발에서의 댄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온 르느와르는 세 점의 대작을 그리는데, 그 중 두 작품의 모델로 수잔 발라동을 기용했다. 발라동은 곡예단 출신으로 몽마르트에서 툴르즈 로트렉의 모델을 시작으로 여러 화가들의 모델을 하고 있었다. 모델 일을 하면서 여려 명의 화가들과 교제하다가 어느 날 아이를 하나 낳게 되는데, 이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르느와르가 아니냐는 의심이 많았지만 그들은 둘다 부인도 시인도 안했다고 한다. 어쨌든 르느와르는 그의 세 번째 뮤즈인 발라동을 만나면서 인상주의와 결별하고 자신만의 마이웨이를 걷게된다.

이때 르느와르는 수잔 발라동을 모델로 한 인상주의와 전혀 성향이 다른 <우산>을 내놓았다. 프랑스에 우산이 발명된 것은 1640년경이라고 한다. 당시의 우산은 고래수염이나 강철로 만든 무겁고 귀한 물건이었는데,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서 영국의 홀랜드가 속이 빈 강철 튜브로 우산살을 만들게 되면서 거짓말처럼 가벼운 우산을 선보였고, 대량생산이 가능해 지면서 기존가격의 1/5 수준으로 떨어지는 우산혁명이 벌어지던 시기였다, 이 작품에서 우산혁명 후 우산이 대중화 된 후, 그림 속 남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로 장만한 우산을 즐겁게 펼쳐들고 있다. 그림의 배경인 파리가 비가 드문 도시이기 때문에 이들은 새 우산을 쓸 기회가 흔치 않았기에, 미만 오면 반가운 파리지엥들은 우산을 쓸 기회가 찾아와 모두가 즐거운 들 뜬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르느와르의 <우산>에는 축축한 비의 느낌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사람들은 앞다투어 우산을 펴 든다. 화면 왼편의 신사도, 푸른 드레스를 세련되게 차려입은 여인도 갑작스런 비를 반기는 듯 표정들이 밝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의 눈동자를 의식적으로 선명하게 그렸는데, 특히 왼쪽 아가씨인 수잔 발라동의 그윽한 눈빛은 르느와르의 애정이 듬뿍 담긴 듯 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지켜보는 오른쪽의 굴렁쇠를 든 귀여운 꼬마의 눈은 우리를 쳐다보고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도 그림의 일부인양 그림 속에 몰입하게 해준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이 그림 속에는 빗방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림 속에 가득한 우울한 푸른 빛을 본 순간, 이 그림이 포착한 장면이 막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풍경임을 저절로 알 수 있게 해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조차 보이게 하는 힘! 이것이 명작의 위대함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그림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오른쪽을 그리고 4년후에 왼쪽을 그렸다고 하는데, 그러다보니 그림 속의 화풍이 왼쪽과 오른쪽이 조금 다르다. 왼쪽의 남자와 발라동이 모델인 아가씨의 윤곽선이 오른쪽 소녀들보다 더 뚜렷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윤곽선이 예전 그림들보다 다소 딱딱해 보이는데, 이는 그가 인상주의와 더 멀어지는 중임을 알 수 있다.

수잔 발라동 <푸른 침실> (1923)

그 후 르느와르와 발라동은 어떻게 되었을까?

르느와르는 세 번째 연인 샤르고와 동거한지 9년만에 결혼하여 아들 셋을 낳았는데 둘째 아들 장은 후에 유명한 영화 감독이 된다. 수잔 발라동은 에드가 드가에게서 그림을 배워 그녀 자신도 유명한 화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도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 그녀는 후에 은행가와 결혼하였으나 이혼하고 자신의 아들 보다도 세 살 어리고 그녀 보다는 21살 연하인 앙드레 위터와 결혼하며 나름 행복한 삶을 살게 된다. 예술가들의 사랑은 오래 전에 갔지만 그들의 예술작품은 아직도 비오는 날 우산을 펼칠 때마다 생각나게 해준다.


++ 피에르 오귀스트 르느와르(1841~1919), <우산>, (1881~1885), 캔버스에 유채, 180.3x114.9cm,  Natioanl Gallery. 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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