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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김 Apr 24. 2018

세상을 떠난 당신의 꽃에 물을 주고 있습니다.

아직도 살아있기에, 남의 죽음은 늘 나의 것보다 먼저 찾아온다.


아마 처음은 외할아버지였던 것 같다. 몇 살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던 어느 날 밤에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어른들의 통화 소리가 방 바깥에 들렸고, 나와 내 동생은 방에 들어가 얌전히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른들은 우리를 장례식장에 데려가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놀라며 주셨던 구슬 장난감 십 수개만이 할아버지의 유일한 흔적임을 알았을 때 더 이상 할아버지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지막 순간 희미해진다. 처음에 구슬을 한 두 개 잃어버렸을 때, 나는 세상을 잃은 것 같았다. 마치 내가 구슬을 잃어버려서 할아버지를 다시는 볼 수 없는 줄 알았다. 시간이 많이 흐르자 구슬들은 자꾸만 사라졌고, 그럴 때마다 나는 사라진 사실을 점점 늦게 깨달았다.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할아버지의 얼굴은 자꾸만 흐릿해져 갔다. 몇 년이 지나자 내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보는 액자 속 할아버지가 먼저 떠올랐다. 몇 번 이사를 갔더니 구슬은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누군가는 세상을 떠났다. 봄방학이 끝난 교실에 한 자리가 비었을 때는 그 자리에 놓인 국화로 채울 수 없을 만큼 먹먹했다. 하지만 식당 텔레비전에서 본 먼 나라 누군가의 죽음이나, 이름도 없이 숫자만 적혀있는 기사 위의 죽음은 내가 소화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중 몇몇의 죽음은 비웃길 좋아하는 재미없는 사람들에게 소비되곤 했다. 대부분의 죽음은 오래 머물지 않고 스쳐 지나갔지만 모든 죽음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작년 여름을 지나 다시 올해 봄이 올 때까지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죽음을 사유했다.


illust by instagram @arumi0503

작년 여름에 나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외롭기도 하고 적적한 시간을 주로 내 친구 엄도와 보냈다. 엄도는 요리를 꽤 잘해서 가끔은 자취방에 초대해서 요리를 해 먹곤 했다. 정리되지 않은 좁디좁은 방에는 힘없는 꽃이 하얀 화분 위에서 자라고 있었다. 초록 잎은 축 쳐져있었고 노란 꽃이 한 두 송이 작게 피어있었다.


"이 꽃은 뭐야?"

"얘는 노랭이야."


노랭이는 칼랑코에라는 꽃이었다. 내가 보기엔 대부분이 초록 잎으로 뒤덮여 있고  노란 꽃 두 송이만 있을 뿐인데 이름이 노랑이라는 게 조금 웃겼다. '너의 무관심에 자라는 꽃과 어지러진 네 방에 조금은 안 어울리는 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엄도의 말을 듣고 섵부르게 내뱉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 걔가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되었고, 나는 그 친구를 위해 마음상자를 만들었어. 상자에 행복한 생각이 들 때마다 돈을 넣었어. 천원이 있을 땐 천 원을 넣고 백원이 있을 땐 백 원을 넣었어. 우리는 그 돈으로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도 같이 만들었어. 그리고 걔는 세상을 떠났어. 그때 마음상자에는 팔천 원인가 육천 원이 있었고, 나 혼자 그걸로 뭘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산 게, 꽃집에서 데려온 이 노랭이야."


어느 날 엄도는 며칠 집에 다녀온다면서 나에게 노랭이를 맡겼다. 볕 드는 곳에 두고 삼일에 한 번 물을 주면 된다고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엄도의 집에서 내 자취방으로 노랭이를 옮겼고 일주일 동안 물을 두 번 주었다. 그런데 집에 다녀온 엄도가 노랭이를 찾지 않았다. 나는 엄도가 혹시 노랭이를 잊은 게 아닐까 싶어 언제 찾아갈 것이냐고 물어보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에 당황했다.


"나 곧 스위스로 교환학생 가잖아. 오빠가 쭉 맡고 있다가 나 유럽에서 돌아오면 돌려줘. 노랭이 잘 부탁해."


그렇게 노랭이와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엄도가 시킨 대로 삼일에 한 번 물을 주었지만 노랭이는 생각보다 건강하지 않았다. 얼마 없던 꽃은 이내 져버렸고, 힘없는 잎을 볼 때마다 나의 마음 어디선가 책임감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노랭이를 볼 때마다 그 친구의 죽음을 떠올렸다. 인생은 시들어갈 수 있지만 죽음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랭이의 시든 잎을 쳐내고 부엌에서 가장 햇볕이 잘 드는 방으로 옮겨주었다. 혹시 노랭이가 아픈 이유가 밟고 서 있는 흙 때문일까 걱정도 했다. 노랭이를 위한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나서는 일주일에 한 번 물을 주기 시작했다. 한 번은 노랭이에게 아프지 말라고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제야 노랭이가 정신을 차리고 쑥쑥 자라기 시작했다.


엄도는 스위스에 가서도 종종 노랭이의 안부를 물었고, 나는 노랭이에게 물을 주는 날이면 엄도에게 연락하고는 했다. 노랭이는 처음에 쑥쑥 잘 자랐다. 쳐다보고 있으면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물을 줄 때마다 웃자란 것이 보여 뿌듯했다. 엄도에게 자랑했더니 엄도는 어느 날 몰래 자라 있는 것이 꼭 마음 같다고 했다. 노랭이가 잘 크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노랭이 잘 크고 있어?"

"요새 노랭이가 잘 크지를 않아."

"노랭이도 가끔 성장을 멈추고 싶을 거야."


어쩌면 내가 아니라 마음상자에 돈과 함께 담아둔 엄도와 세상을 떠난 친구의 마음이 노랭이를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들었다.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엄도는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노랭이를 돌려주기 위해 엄도와 만났고 처음 봤을 때 보다 훌쩍 자란 노랭이를 보며 나에게 고마워했다.


"오늘, 노랭이 분갈이 해주자."


그 날은 주말이었고, 처음에 노랭이를 산 꽃집은 문을 닫아서 다른 꽃집을 찾아가야 했다. 왜 꽃을 안 피웠냐는 꽃집 아주머니의 물음에 나는 원래 여름에만 꽃을 피우는 게 아니였냐고 되물었다. 여름에 노랭이가 나에게 온 이후로, 한 번도 노란 꽃을 피운 적이 없었다. 나는 칼랑코에가 꽃을 필 계절이 아니어서 그런 줄 알았다.


"얘는 물을 가끔 줘야 해. 겉에 흙이 완전히 말라서 기운이 없을 때 한번씩 주면 돼. 아마 물을 자주 줘서 꽃은 안 피우고 대신에 이렇게 웃자란 것 같네."


내가 좋아하던 단편선이 떠올랐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저명한 작가는 자신을 도와주던 어시스트에게 예쁜 꽃을 피우는 식물을 선물했는데, 아무리 열심히 보살펴도 꽃을 피우지 못한다. 시간이 얼마 안 남은 작가의 마지막 작품을 돕기 위해 어시스트는 병원에 남아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다. 결국 작품을 완성하고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작가는 어시스트에게 식물을 목마르게 두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으면 식물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낸다고. 작가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집에 돌아온 어시스트가 본 것은 마지막 순간에 눈부시게 시리도록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는 장면이었다.  


노랭이는 나에게 꽃 피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시린 고통을 이겨내고 피우는 꽃은 나보다 엄도가 보는 것이 더 어울린다. 엄도와, 엄도의 친구에게 아프지 않고 튼튼하게 노랭이를 키우고 지켜준 것으로 나는 만족하기로 했다. 엄도는 노란 꽃을 피울 노랭이에게 어울리는 빨간 화분을 새 집으로 골랐고 노랭이는 다시 엄도에게로 돌아갔다. 노랭이가 건강하게 크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안녕 노랭아! 건강하게 지내


 

새 집을 얻고 엄도에게 돌아간 노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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