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 다른 삶을 마주하다 #2

2) 올라갈 날을 위해 웅크린 사람들

by 건작가

게스트하우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한다. 그중에는 도망치듯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많았다. 현실이 버거워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스스로 다독이기 위해 제주로 온 사람들이었다.


가끔은 그들의 표정에서 많은 걸 읽을 수 있었다.


피곤함,

막막함,

그늘진 고민.


어떤 사람들은 조용히 바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어떤 사람들은 낯선 이들과 술을 기울이며 속에 담아둔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다시 일어서기 위해 웅크리고 있었다.




2-1) 자퇴하고 여행하는 작은 거인


“학교가 의미가 없더라고요. 어차피 가도 뭐… 할 것도 없고.”


자퇴하고 제주에 여행 온 작은 여자아이가 말했다. 왜인지 열일곱 살이었지만 말투는 너무나 어른스러웠다.

처음에는 그저 조용한 손님이었다. 파티에서도 조용히 음료수를 마시던 조그마한 아이. 알고 보니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여행하면서 지내고 있다고 소개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여행하는 삶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았다. 실례가 될까 싶어 묻지는 않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던 듯하다.


“앞으로 어떤 거 하고 싶어요?” 어떤 손님이 물었다.

“제가 하고 싶은 여행을 다니면서 살고 싶어요.” 그녀가 답했다.


나는 그녀의 말에서 왜인지 모르게 불안보다는 희망이 더 묻어 있음이 느껴졌다.

다 함께 반짝이는 밤하늘을 보며 산책했다. 웃고 떠들며 영상을 찍었다.


그녀는 다음날 제주를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덕분에 제주에서 좋은 추억을 가지고 가요!" 그리고 편집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는 소식이었다.


그녀가 남긴 추억이 반가웠지만, 영상을 따로 찾아보진 않았다.


그녀가 보낸 메시지를 보며, 나는 그녀가 언젠가 유명한 유튜버가 되기 위해 묵묵히 준비하고 있다고 생각해 속으로 응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녀의 숙박을 문의하는 부모님들의 전화가 쏟아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알아보니 웬걸.


그녀의 영상이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올라가면서 몇십만 구독자를 보유할 정도로 유명해졌고, 그녀가 다녀간 곳들을 따라 여행하는 학생들이 생긴 것이었다.


그녀는 이미 올라가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채 웅크리고 있던 작은 거인이었다.




2-2) 제주로 도망친 국가대표 선수


어느 날, 한 통의 연락이 왔다.

“혹시 게스트하우스에서 스태프를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사연일까 알고 보니 그녀는 외국에서 활동하는 국가대표 선수였다.


그녀는 오랜 시간 함께했던 남자친구와의 이별과 끝이 보이지 않는 선수 생활에 지쳐 있었다. 몸도 감정도 한계에 다다랐고, 편도 비행기를 끊고서 무작정 제주로 왔다고 했다.


나와는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온 친구였다. 세계를 무대로 뛰던 그녀와 게스트하우스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내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녀는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다.


술만 마시기 전까진.

술이 들어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녀를 깊은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듯했다.


“오빠, 난 정말 왜 이럴까…”


그 말이 가슴에 남아 못내 안타까웠다.


그녀는 술에 취해 사고를 치기도 했고, 마음이 복잡한지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그녀가 자잘한 실수를 해도, 사고를 쳐도 나는 묵묵히 챙겼다. 나는 그녀가 언젠가 반드시 이겨내고 크게 성장할 사람이라는 걸 믿어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그녀가 제주에 있는 동안 우울을 완전히 없애주진 못했다. 하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녀가 얼른 정신 차리고 안정되게 응원해 주는 것뿐.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지나가다 우연히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편입도 하고, 남자친구도 만나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


그 소식을 듣자 나는 안심이 되었다.

그녀가 잘 이겨내고 다시 위로 올라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이제야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빈아, 투자해 주기로 한 약속 기억나지?!"


그렇다, 그녀는 금수저다.




2-3) 감귤에 침놓는 한의사


“그냥, 좀 쉬고 싶다.”


그때 형이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자세히 물어보진 않았다. 다만, 제주에 내려와 한동안 머물고 싶다고 했다.


형과의 인연은 꽤 오래됐다.

대학교 대외활동으로 우연히 만났고, 형은 강남에서 한의사로 일하며 바쁜 삶을 살고 있었다. 다방면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었고, 사주에도 재능이 많았다. 사주를 배우러 서울로 형에게 배우러 갈 정도로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한의사로 잘 살아가는 줄 알았던 형이었는데, 갑자기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왔다.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있고 싶다고 하기에 나는 흔쾌히 허락했다. 손님들과도 잘 어울렸고, 자연스럽게 게스트하우스에 녹아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형은 갑자기 서귀포로 떠났다.

처음에는 그냥 한적한 곳에서 쉬고 싶어서 떠난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형은 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귤밭을 가꾸며 농사를 짓더니, 갑자기 귤에 침을 꽂기도 하고, 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형은 귤 농사에서 멈추지 않았다. 농사짓는 과정들을 영상으로 남기고, 지역 주민들과 교류하며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쯤 지났을까?


형이 방송에 나왔다. TV 화면 속 형을 보니 마냥 신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은 농업법인의 대표가 되어 다양한 작물을 판매하는 사업가로 변신해 있었다.

나는 형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놀면서 흘려보낸 시간 동안, 목표를 향해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었구나.'


그런 형을 보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형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누군가에게 목표가 되길 바라고 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