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화초 Sep 23. 2019

게으를 권리를 갖는 것에 대하여

직장에서 게으름은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직장에서 일하는 척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 그리고 미움을 받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고 Alt + Tab을 신속하게 누를 수 있는 민첩성, 먼발치에서도 누구의 발자국 소리인 지 들을 수 있는 뛰어난 청력으로 누가 봐도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능력을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는 과정


흔히 요즘 직장인들을 돈을 벌기 위한 자본주의의 노예라고 부른다. 자본주의 노예는 절대 게으른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직장에서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면 누가 더 힘든 지 썰 배틀이 펼쳐진다. "요즘 일은 좀 어때? 할만해?"라고 물으면 "힘들다" "죽겠다"가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겸손이 미덕이라고 어릴 때부터 배워 온 탓에 "별로 힘들지 않고 잘하고 있다"라고 얘기하면 이상한 사람 혹은 거만한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내가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라도 게으른 모습을 절대 보여서는 안 된다.

그렇게 일만 찾게 되면 어느새 일과 관련되지 않으면 기쁨과 흥미를 쉽게 찾지 못한다. 그나마 존재하는 퇴근 후나 휴일에도 커리어를 쌓기 위한 교육, 취미 활동 등 자기 계발을 하며 일할 땐 초조하고 휴식을 해도 찝찝함을 느끼며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그 결과 금방 쉽게 지쳐 번아웃 증상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최근 많이 생겼다. 극단적으로 퇴사 혹은 이직을 선택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노예와 관련하여 아미리 바라카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노예가 노예로 사는 삶에 너무 익숙해지면 놀랍게도 자신의 다리를 묶고 있는
 쇠사슬에 대해 어느 쪽이 더 빛나는지 더 무거운지 서로 자랑하기 시작한다. 

 

기업 측면에서는 돈을 주고 고용한 직원들이 경영진이 의도한 대로 다른 의견 없이 일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 보상 시스템을 통해 복종하도록 만들고 경쟁 시스템을 통해 직원들끼리 서로 의식하며 더 많은 성과를 올릴 수 있도록 채찍질을 한다. 이러한 시스템에 안락함을 느끼며 자본주의 노예가 되어버린다. 머릿속은 오로지 일 생각만으로 가득 차게 되고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게 된다. 

고대와 달리 현대 자본주의의 노예들은 학사모를 쓴 조금 더 똑똑한 노예가 되었다.

게으를 권리를 갖는 것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복종할 줄만 알고 불복종하지 못한다면 그는 노예이다"라고 말했다. 불복종은 굉장히 자극적인 단어다. 누구나 부당한 체제에 "아니오'를 외치며 정의를 구현하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의 <불복종에 관하여>라는 책에 따르면 체제에 불복종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류 역사와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지금껏 인류 역사에서 복종은 선, 불복종은 악으로 구분되어 왔다. 인류 대부분의 역사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했다. 소수가 좋은 것들을 누리고 다수가 소수를 위해 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즉, 다수가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조직화된 인간은 불복종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자신이 복종하고 있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불복종과 관련이 깊은 신이 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다.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는 인간의 모든 문명의 발전이 불복종의 행위에서 시작됐음을 보여준다. 프로메테우스는 신에게서 불을 훔침으로써 인류의 진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만약 프로메테우스의 범죄가 없었다면 인류 역사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로메테우스도 불복종의 결과로 벌을 받았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는 전혀 후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신들에게 복종하는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 있겠다”


분명 발전은 불복종이라는 행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프로메테우스처럼 앞장서서 불복종을 외치며 판 자체를 흔드는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굉장한 위험과 도전정신이 필요하다. 한낱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런 대변혁적인 일을 추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직장에서 불복종을 외치면 다음 날 바로 짐 싸서 그대로 나가야 한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게으를 권리가 필요하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것처럼 직장에서 복종만 하고 시키는 일만 하면 노예가 된다. 그러나 불복종만 하고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부적응자가 된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예가 되어서도 안되고 부적응자가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노예와 부적응자의 중간 지점을 잘 찾아야 한다. 


복종의 가장 위험한 함정은 복종의 대가로 얻는 소속감이다. 소속감은 복종의 대상이 갖고 있는 힘을 실제로는 그 힘이 진짜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치 것처럼 느끼는 착각을 준다. 복종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노예로서 맡은 일들을 성실하게 처리하고 부적응자로서 직장보다 정신적, 체력적으로 나를 위해 챙길 것은 챙겨야 한다.

 


게으름과 게으를 권리


게으름과 게으를 권리를 전혀 다른 단어다. 게으름은 말 그대로 게으른 것이다. 나태하고 귀찮아서 일을 안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게으를 권리는 함부로 주어지지 않는다. 게으를 권리를 다른 말로 하면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이다. 이를 갖기 위해선 여러 사람들에게 인정이 필요하다. 게으를 권리를 갖고 있는 사람이 자유를 주장하는 것과 게으를 권리가 없는 사람이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게으를 권리를 갖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본인에게 주어진 일을 누구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정확하게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본인의 일에 관여할 경우 주도권을 스스로가 가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의 부당한 요구에 당당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다. 외부의 의견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일을 처리하고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일의 주도권을 계속 잡고 있으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힘도 함께 생긴다. 다른 사람들보다 반 박자 빠르게 미리 준비했다가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센스를 발휘할 수 있다. 또한 여러 가지 돌발 변수를 예상하고 어떠한 상황이든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다. 이렇게 요령이 생기면 훨씬 더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르고 게으를 권리를 가질 자격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생긴 여유만큼 나를 위해 신경 쓸 시간을 훨씬 많이 확보하게 된다. 


앞으로도 자본주의의 노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겠지만 게으를 권리를 가진 노예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