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면 잘 쓸 수 있을까? 글을 잘 쓰고 싶다는 후배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후배의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렸다.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고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후에 유명 작가들에게 글쓰기를 배운다 해서 글을 잘 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도 들었고 잘 배워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배움의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서슴지 않고 대답할 말이 있으니 그것은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글을 써야할지, 어떻게 써야할지 방황하던 시기와는 다른 고민이다. 바쁘게 일할 때는 여유 있는 삶을 꿈꾸었다. 아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한가하게 놀고먹는 삶을 동경했다. 하지만 실재로 바빴던 일상을 뒤로하고 한가한 삶이 주어졌을 때 찾아오는 무기력감은 실존의 가치를 서서히 퇴색시켰다. 나아가 무가치한 존재라는 생각이 생의 의미조차 흐릿해지게 만들었다.
주어진 하루하루를 가치 있게 살아가면서 보람을 느낀다는 것은 축복 받은 삶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인 것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반드시 일이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내가 잘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인생일까?
<안녕, 나의 한옥 집>의 저자 임수진 작가님과 함께 했던 에세이 클럽 7주간의 과정을 마친지 사흘이 지났다.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마치 오래전 일 같이 느껴진다. 7주 동안 글동무들이 써내는 많은 글을 읽었고, 나도 많은 이야기를 써냈기 때문인 것 같다. 지난 7월 말경에 꿈의 도서관에서 에세이 클럽 3기를 모집했다. 수강신청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신청을 했다. 나는 그 때 당시 어떻게 해야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글 잘 쓰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도 없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 들인지 이미 오래 되었고 그저 오래도록 아마추어다운 모습으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지속적으로 써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았다. 음식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던지라 음식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진즉부터 하고 있었다. 게다가 어떤 형식으로 쓸 것인지에 대해서도 구상을 마친 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세이 클럽을 수강하게 된 이유는 함께 글을 써나갈 문우가 필요하다는 생각과 어딘가에 메여야 글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감이 있어야 시간에 맞춰 글이 나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임수진 작가에 대해서 알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앤을 좋아하고 앤을 닮은 밤호수에 대해서.
8월 19일(금요일) 늦은 더위와 함께 에세이 수업이 시작되었다. 글 선생님의 시간은 오전 8시 수강생들의 시간은 밤 9시. 미국의 오전 시간과 한국의 밤 시간이 견우와 직녀가 만나듯 매주 금요일 밤에 이어졌다. 지금 와서 첫 시간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시작하기 전에 살짝 긴장이 되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이 모였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첫 시간에 글 선생님은 수업 시간 10분 전에 zoom교실에 들어와 있었는데 수강생들은 9시가 다 되도록 들어오지 않고 늦장을 부렸다. 수업시간엔 가상공간에 함께 있었지만 마음은 서로 1미터씩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에세이 3기에는 모두 여덟 명의 수강생들이 모였는데 다양한 직업과 나이, 글 성향, 기대감 또한 모두 달랐다. 2주가 지나고 글 선생님은 우리를 ‘신기하고 오묘한 에세이 3기’라고 표현 했다. 에세이 클럽 1기와 2기 때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을 우리 동기들에게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 3기는 어떤 주에는 과제물을 내지 않고 있다가 수업하기 하루 전에 와르르 내지를 않나, 어떤 주는 숙제를 내자마자 미리 과제물을 주르륵 제출해서 글 선생님이 글을 읽고 첨삭하는데 시간적인 여유를 주지 않았다. 마치 임수진 작가가 디디털 리딩 기계라도 되는 냥 그렇게 몰아댔다. 이런 수강생들을 보며 “아니 왜들 이렇게 정신없게 하느냐.”고 말할 법도 한데 신기하고 오묘하다는 표현을 하다니. 그 때부터 나는 글 선생님의 품성을 보게 되었다. ‘아! 이 분 제대로 가르칠 사람 맞네.’ 라는 느낌이 왔다. 해님과 바람 중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언제나 해님이라는 동화도 생각났다.
글 쓰는 방법과 기술은 어디서든 배울 수 있다. 글쓰기는 방법에 관한 책과 동영상, 강좌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하지만 글을 읽는 자세와 글 쓰는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사람에게서만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매 시간 임수진 작가를 배웠다. 그녀의 솔직하고 가식적이지 않은 열정을, 무작정 사람을 좋아하는 자세를, 경쟁하지 않고 함께 계속 글을 써나가길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을, 각자의 개성을 살려 더 깊어지도록 안내하는 태도를, 우리들이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묵은 감정을 끄집어 낼 때마다 무조건 공감해주고 격려하고 다독여주는 따뜻한 마음을.
7주간의 에세이 과정을 마친 동기들은 모두 개성이 뚜렷한 사람들이다. 각자가 써낸 글의 느낌도 모두 다르다. 글 쓰는 주제도 제각각이다. 이런 글동무들과 7주간의 에세이 과정을 마치고 나니 마치 우리들이 비빔밥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주의 전통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계절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 청포묵, 도라지, 오이, 호박, 당근, 표고버섯, 고추장, 참기름이다. 백옥 같이 하얀 쌀밥 위에 양념된 재료들이 삥 둘러앉은 비빔밥은 그릇 안에서 각각의 색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이때 비빔밥의 이미지는 마치 색동저고리를 입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수줍은 새색시의 모습이다. 예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하고 화사하기까지 하다.
이처럼 각각의 나물들이 제 맛을 유지한 채로 한 자리에 둘러앉아 있을 때는 보기에만 좋다. 하지만 나물 위에 고추장과 참기름을 넣고 쓱쓱 비벼주기 시작하면 그제야 비로소 초록이 동색이 되듯 모든 재료가 발그레한 옷을 입는다. 섞어줘야 맛이 있어지는, 섞여야지만 제대로 된 맛을 내는 비빔밥. 이렇게 비벼진 비빔밥이야 말로 에세이 7주 과정을 수료한 3기 글동무들의 맛이다.
에세이 클럽 3기 글동무들은 고사리처럼 짙은 마음을 가진 동무도 콩나물처럼 담백하고 아삭함이 느껴지는 동무도 청포묵처럼 노란 병아리 마음을 가진 동무도 있다. 또 시금치처럼 파릇하기도 하고 도라지나물처럼 하얗고 쌉소롬한 맛이 나기도 하며 호박처럼 물컹하면서 촉촉하기도, 당근처럼 명랑하기도, 표고버섯처럼 고기 맛이 나는 동무도 있다. 에세이 첫 시간에 이렇게 각각의 재료로 앉아 있던 글동무들을 글 선생님은 매시간 비벼주기 시작했다. 매콤한 고추장과, 고소한 참기름을 넣어가면서. 그래서 우리는 맛있는 비빔밥이 되었다. 각자의 글을 따로 써내지만 또 함께 글을 쓰는 글동무들이 되었다.
‘여전히’ 글을 써나가기 위해선 강인한 의지가 요구된다. 쓰기 싫은 마음이 찾아 올 때도 그 마음을 지그시 누르며 무시할 줄 알아야 하고, 나 스스로 흡족하다 생각될 때까지 뚝심 있게 써낼 줄 아는 인내심도 필요하다. 다독(多讀), 다상량(多商量), 다작(多作)해야 하는 엉덩이의 힘 또한 필요하다. 홀로 이런 무시무시한 과정들을 겪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함께 써나가는 글동무들이 있다면, 그 글동무들을 지지해주고 관심 가져 주는 글 선생이 있다면 외롭고 긴 여정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오래도록 ‘여전히’ 글을 써나가면 좋겠다. 나와 함께했던 에세이 클럽 동기들도 그러길 바란다.
함께 ‘여전히’ 글을 써나갈 때 우리 모두 자기 자신을 이겨내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글과 경쟁하려 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지난 글과 지금 쓰는 글을 경쟁시키면 좋겠다. 타인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힘겨루기를 포기하는 것이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법은 지독하리만큼 자기 자신과 힘을 겨루어야 하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