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현역 작가로 남기를 소망했던 박완서 작가를 좋아한다. 불혹이라는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한 그녀의 늦은 출발이 너무 멋져 보였다. 그녀의 글은 소박하면서도 알차고 단순하면서도 탱글탱글한 탄력이 있다. 모진 삶을 살아오면서 새겨진 아픔의 흔적을 풀어내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으면서도 그녀의 글은 아픔과 상처조차 절제되어 있다. 또한 사회의 구조적인 부당함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글 속에 매운맛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세상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다. 열무의 매운맛을 빼고 담은 열무김치처럼 그녀의 글은 독자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고 아삭거리기만 한다.
시어머님께서는 오랫동안 김치를 담가주셨다. 내가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김치를 담기 시작했으니 25년이 넘도록 우리 집 김치를 책임져주신 것이다. 어머님께서 담가주신 김치 종류는 실로 다양했다. 배추김치, 열무김치, 고들빼기김치, 오이지, 파김치, 가지김치, 깍두기 등등. 계절마다 텃밭에서 기른 채소를 뽑아 담가주시는 어머님의 김치는 정성이 가득했다.
언젠가 어머님 곁에서 열무김치 담그는 모든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우물가에 쌓아둔 싱싱한 열무는 잎사귀 앞뒷면에 잔털이 수북했고 열무의 머리에는 갓난아기 손가락만큼 작고 가느다란 뿌리가 달려 있었다. 밭에서 막 뽑은 열무는 어찌나 싱싱했는지 조금만 힘을 주어 구부려도 툭! 부러졌다. 어머님께서는 열무를 손으로 무심하게 뚝뚝 자르시더니 물에 넣고 씻으셨다. 깨끗하게 씻은 열무를 커다란 고무 다라이에 담은 후, 눈처럼 하얀 소금을 서너 주먹 듬뿍 뿌린 후 채반으로 덮어두셨다.
열무가 절여지는 동안 장독대 위에 서 있던 커다란 항아리에서 바싹 마른 고추를 한 바가지 꺼내오셨다. 나는 강아지처럼 어머니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며 무언가 도울 일이 없을까 눈치를 살폈지만 어머님께선 결코 나를 조수로 쓰지 않으셨다. 어머님의 눈엔 며느리인 내가 언제나 서툰 새댁으로만 보이는 것 같았다. 김치 담그는 일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며느리는 하기 힘들고 오직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고추 다듬는 일쯤은 나도 할 수 있는데 어머님께선 손수 바삭하게 마른 고추를 가위로 잘라서 씨를 빼셨다. 검붉은 고추 안에서 노랗고 납작한 고추씨가 종알거리는 여중생들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고추씨를 털어낸 고추는 물에 잠시 불린 다음 확독에 넣고 득득 가셨다. 믹서기를 사용하는 나로선 작은 돌멩이를 이용해서 두 팔로 고추를 가는 어머님의 기술은 발 벗고 뛰어도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머님의 두 팔이 확독 위에서 원을 그릴 때마다 고추가 뭉개지며 붉은 물감을 짜 놓은 것 같은 걸쭉한 상태가 되었다. 거기에 마늘, 생강, 밥을 넣고 조금 더 갈다가 조선간장으로 농도를 맞추셨다.
김치를 버무릴 양념을 이렇게 준비하고 나면 열무는 소금에 절여져 뻣뻣한 상태라곤 온데간데없어지고 매듭을 묵어도 될 만큼 유연해진다. 어머님은 이렇게 유연해진 열무를 갑자기 빨래 빨듯 빡빡 주무르기 시작하셨다. 그럴 때 열무에서 초록색 물이 퍼렇게 빠져나왔는데 나는 이 장면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다. 열무를 저렇게 마구 주무르면 풋내가 날 텐데 왜 저러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상한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어머님께선 소금에 절인 열무를 이렇게 빨래하듯 주물러주면 매운맛이 빠져나오고 먹을 때 부드럽다고 하셨다. 어머님의 설명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는 김치 담는 일 앞에서는 어머님의 졸병이었므로 입을 꼭 다물고 구경만 했다.
이렇게 빨래하듯 주무른 열무를 물에 여러 번 헹구어 물기를 뺀 다음 고추 양념에 버무리셨다. 막 버무린 열무김치는 어머님 말씀대로 풋내도 전혀 없고 막 담은 김치의 뻣뻣함도 없었다. 게다가 아삭한 식감과 열무 특유의 시원한 맛 때문에 여름 내내 식탁 위에서 훌륭한 밑반찬이 되어주었다.
글쓰기 과정도 어쩌면 김치 담그는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뻣뻣한 열무에 소금을 뿌려 일정한 시간을 두어야 숨이 죽듯, 글 또한 생각을 뿌려 연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나만 읽게 되는 일기를 쓰는 경우라면 글에서 매운맛이 나든 쓴맛이 나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지만 한두 사람이든 백 명이든 누군가가 읽을 게 분명한 글이라면 다듬고 또 다듬어서 매운맛을 뺀 순한 글을 써야 할 것 같다. 열무의 매운맛을 빼고 담가주시던 어머님의 열무김치처럼 내 글도 쓸 때마다 많이 주물러서 매운맛을 빼내고 싶다. 소금에 절이고 손으로 주무르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주먹구구 레시피(열무김치 매운맛 제거하고 아삭하기 담그기)
재료: 열무 1단, 천일염, 고추 양념(붉은 생고추 10개, 양파 작은 것 3개, 액젓, 새우젓, 매실청, 통깨) 고춧가루 2큰술.
<열무의 매운맛 제거하기>
1. 열무를 손질한 뒤 켜켜이 소금을 뿌린 후 물을 두세 컵 골고루 부어준다.
2. 30분 간격으로 열무의 위치를 위아래로 바꾸어 준 뒤 열무의 줄기 부분을 구부렸을 때 끊어지지 않고 부드럽게 구부려질 때까지 푹 절인다.(2시간 정도)
3. 잘 절여진 열무를 빨래 빨듯 박박 주물러 준 다음 깨끗한 물로 여러 번 헹구어 물기를 뺀다.
<열무김치 담그기>
1. 생고추를 믹서기에 넣고 매실청: 액젓: 새우젓의 비율을 1:1:1로 넣은 다음 양파와 마늘 생강도 넣고 갈아준다.
2. 잘 갈아진 고추양념에 고춧가루와 찹쌀 풀, 통깨를 적당히 넣고 섞어 준 다음 물기 빼둔 열무와 얇게 썬 양파를 넣고 버무려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