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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숙제 (도토리묵)

by 김경희


에세이 클럽을 마치자마자 소설 창작 수업이 시작되었다. ‘꿈의 도서관’은 어쩌면 이리 강좌 스케줄을 절묘하게 구성하는지 따라가다 보면 가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때가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나의 선택과 결정에 의한 것인지라 오롯이 내가 감당해 내야 할 일이지만 힘들 때마다 나는 ‘꿈의 도서관’ 때문에 바빠 죽겠다며 투덜댄다.


지나 놓고 보니 소설의 첫 시간과 에세이의 마지막 시간이 맞물린 시월의 첫 주는 알찬 주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당시에는 수업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워서 헐헐거렸다. 에세이 수업이 끝나고 나서도 에세이 클럽 3기의 글동무들과 매주 한 편의 에세이 쓰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에세이 선생님의 배려 덕분에 글쓰기를 멈출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지금도 한 주에 에세이 숙제와 소설 숙제를 병행해서 써야 하는 분주함 속에 머물고 있다. 올해만큼은 이것저것 맘껏 배우기로 했으니 이런 부담감은 신선하게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이번 주 소설 반에 제출해야 할 숙제는 주제가 쉽지 않아 글을 시작하기 전부터 골치가 아팠다. "다리를 잃은 불구의 아들을 등에 업고 한 달에 한 번씩 사창가를 찾는 어머니"에 대한 엽편 소설을 써오라는 숙제였다. 나는 숙제를 받던 순간 손을 번쩍 들었다. 주제가 너무 어려우니 다른 주제를 하나 더 달라고 했다. 잠시 고민하던 선생님은 "40대에 은퇴해서 놀고 있는 자녀와 90대 노동자가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주제를 하나 더 던져주었다. 후아! 이건 더 머리를 짜내야 할 주제 아닌가?


두 가지 주제 앞에서 첫 번째 주제로 엽편 소설을 써야겠다 마음먹었다. 어차피 두 주제 모두 경험이 없긴 마찬가지인지라 상상력에 의한 글이 될 테니 이왕이면 좀 더 쓰기 힘든 주제를 선택했다. 나는 학교 다닐 때도 쉬운 문제보다 어려운 문제를 먼저 푸는 버릇이 있다. 어려운 문제를 먼저 풀고 쉬운 문제를 나중에 풀면 쉬운 문제는 거저먹기라는 지혜를 어려서부터 깨달은 탓이다.


에세이 글 속에 들어간 소설도 액자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아니 이건 액자 에세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번 주는 에세이 숙제와 소설 숙제를 하나로 묶어보았다. 이런 요령은 이번 주에만 부려볼 작정이다.








<모정> 제출자: 현지 마미


보라색 불빛이 환하게 비치는 넓은 창이 보였다. 상아색 얇은 커튼이 하늘거리며 넓은 창을 가리고 있었지만, 창문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용왕님이 주무시는 용궁의 침실은 저런 몽환적인 느낌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문 안쪽으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늘씬한 여자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의 조각상처럼 실루엣의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얇은 천 조각뿐이었다. 그것도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린.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넓은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보라색 불빛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걸었다. 콧등 위로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이마에선 땀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늦가을의 어둑한 밤이라 기온은 낮았지만, 서른 살이 넘는 장년을 업고 100m가 넘는 좁은 골목길을 걷다 보니 몸에서 열이 났다. 몸무게가 48킬로 밖에 나가지 않는 가녀린 몸으로 뼈마디가 굵은 장년을 등에 업고 걷는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 같았지만, 엄마라는 이름은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수! 거의 다 왔어. 오늘은 엄마가 밖에서 기다리지 않고 내일 아침 일찍 데리러 올게. “

수는 말없이 내 등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보라색 불빛이 가까워지자 수는 고개를 기웃거리며 등에서 내리려는 시늉을 했다. 혼자선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면서 마음은 이미 꽃님이를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수가 한 달에 한 번씩 꽃님이가 있는 아가씨 집을 들락거린 지 벌써 3년이 다 되었다.


”망할 계집애. 미영이란 년만 아니었음 네가 이 꼴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 수를 바라보며 답답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미영에게 욕을 해댔다. 미영이와 수는 결혼을 앞둔 사이였다. 성악을 전공했던 수는 이탈리아로 유학을 갔다가 성악 아카데미에서 미영이를 만나 연인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위험에 처한 미영이를 구하느라 차에 치인 수는 두 다리를 잃고 말았다. 생사를 헤매던 수가 다리 절단 수술을 받고 재활 치료를 받는 동안 미영이는 수를 떠나 버렸다. 미영이를 떠나보내고 수는 살아갈 이유가 없다며 자살 소동을 벌이다 실패하자 식음을 전폐했다. 나는 수에게 두 손을 싹싹 빌며 무릎을 꿇고 제발 엄마 곁에 있어 주기만 하라고 몇 날 며칠을 울면서 애원했다. 이런 내 모습이 가여웠는지 수는 어느 날 내가 가져다주는 밥을 받아먹기 시작했다.


수를 업고 보라색 불빛 안으로 들어가니 입술에 빨간 루주를 바른 꽃님이가 수에게 눈웃음을 치며 나왔다. 3번 방으로 안내하는 꽃님이를 따라 수를 업고 들어갔다. 3번 방은 조명이 약해서 어두웠지만, 벽에 알몸으로 교태를 부리고 있는 그림이 희미하게 보였다. 수를 침대에 앉혀두고 뒤돌아보지 않고 나왔다. 보라색 불빛 아래서 꽃님이가 엄마라고 부르는 여자에게 흰 봉투를 건넸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고 봉투 속에 든 돈을 꺼내더니 입술을 실룩거리며 하나, 둘, 셋넷……. 숫자를 셌다.


”이번 달까지는 그냥 이만큼만 받겠는데 다음 달부턴 한 장 더 올려줘야겠어요. 꽃님이 찾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댁의 아들 사정 봐주는 게 우리는 손해라니까. 그것도 오늘은 꽃님이랑 자고 간다며. 게다가 다리마저……. “ 꽃님이 엄마는 말끝을 흐리며 나를 힐끔 쳐다봤다. 나는 그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문을 열고 나와서 수가 들어간 건물 모퉁이에 등을 기대고 섰다. 수에게는 기다리지 않을 거라고 말했지만 수를 두고 집으로 발걸음을 바로 옮길 수가 없었다. 3번 방 창문인 듯한 작은 창문 사이로 꽃님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가끔 수의 낮은 목소리가 꽃님이의 웃음소리와 섞였다. 둘의 웃음소리가 멈추더니 샤워기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들렸다. 잠시 후 작은 창문으로 새어 나오던 옅은 불빛마저 꼬리를 감추었다. 밤이 조금 더 길어지길 기도하며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꽃님이가 일하는 집 뒤편으론 자그만 연못이 있었다. 한여름엔 연못에서 어찌나 예쁜 연꽃이 피어나는지 보라색 불빛과 분홍색 연꽃의 조화는 서로 견줄 수 없을 만큼 둘 다 아름다워 보였다. 연꽃이 한창 피어날 때 사람들은 연꽃 구경을 하러 왔다가 보라색 불빛이 화려하게 빛나는 넓은 창가를 지나치며 눈살을 찌푸리며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연꽃과 어우러진 보라색 불빛이 무지개가 그려낸 여덟 색깔 반원처럼 느껴졌다.


수를 꽃님이에게 처음 데리고 다녀왔던 나를 보며 남편은 ”당신 제정신이야?”라고 했었다. 하지만 꽃님이를 몸으로 만나고 온 날부터 수는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해졌다. 초점을 잃은 눈도 또렷해지고 가끔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 레슨 받던 아리아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마치 꽃님이를 만나기 위해 한 달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이런 수를 보면서 남편은 골프 치는 것도 자제하고 돈을 아끼기 시작했다. 한 번이라도 더 수를 꽃님이에게 데려다주라고 했다. 사람이 사람을 치유하는 것 같다며, 몸으로 하는 사랑이 상처를 아물게 하는 것 같다며.


어스름하게 피어나는 새벽길을 밟고 수가 어젯밤을 지낸 꽃님이네 집으로 향했다. 전 날 수를 업고 무겁게 걸어가던 그 골목길을 나 혼자 걸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넓은 창문으로 어젯밤에 새어 나오던 화려한 보라색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흑백 사진 속에 홍등가의 유리창 넓은 집이 그냥 거뭇하게 들어있는 것 같았다. 넓은 창문 앞으로 다가가니 꽃님이 엄마가 앉았던 의자에 수가 앉아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바라보며 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으면서도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수를 등에 업고 주춤주춤 걸었다. 골목을 빠져나오는데 새벽의 공기가 콧구멍을 타고 기도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오면서 입에서 하얀 김으로 변했다. 상강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찬 공기가 허파 속으로 들랑거리니 몸이 오싹거렸다. 수도 추운지 내 등에 제 몸을 딱 붙이고 있다가

”엄마! 나 꽃님이랑 결혼해도 돼? “

”응? 꽃님이가 그러재? “

”응. 꽃님이도 나하고 결혼하고 싶대. “

”진짜? “

”응. 그런데 꽃님이랑 결혼하려면 큰돈이 필요한가 봐. 꽃님이가 엄마한테 돈을 갚아야 그 집을 나올 수 있나 봐 “

”그게 얼만데? “

”오천만 원쯤 있어야 한다나 봐. “

“오천만 원을 당장 어디서 구한다니......”

나도 모르게 후하고 한숨이 나왔다.

“엄마! 내가 벌게. 지난달에 성태가 성악 입시 반 개인지도를 부탁했는데 내가 거절했거든. 근데 하겠다고 하면 가르칠 학생들은 많을 거야.”

“수야! 그렇게 꽃님이가 좋아?”

“...... 오천만 원 내가 벌게 엄마!”


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미영이 때문에 죽겠다고 하던 수가 이제는 꽃님이를 위해 살겠다고 아니, 돈을 벌겠다고 한다. 수를 따라 나도 무엇이든 해서 돈을 벌어야 할까 보다. 어떤 일을 해야 할까? 피아노 레슨을 다시 시작할까? 환희가 같이 하자던 방문 판매를 해볼까? 명숙이 부탁으로 보험설계사 시험을 본 적이 있는데 조원으로 들어가겠다고 할까? 수와 내가 한 몸이 되어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동안 수와 나의 머릿속엔 이미 오천만 원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어젯밤 수와 꽃님이가 사랑을 나누던 넓은 창이 점점 멀어졌다. <끝>






소설 숙제를 마치고 나서 도토리묵을 끓였다. 지인분이 청주까지 가서 도토리 앙금을 사 왔다기에 1킬로를 주문했더니 가져다주셨다. 도토리 앙금을 건네주면서 "선생님! 이거 끓이기 엄청 쉬워요. 도토리 앙금과 물을 1:4 비율로 넣고 10분 정도만 끓이면 돼요." 세상에나 뭔가 특별한 방법이 있을 줄 알았는데 도토리묵 만들기가 이렇게 쉽다니.


정말 도토리묵 만들기가 이리 쉬울까? 의아한 마음으로 1:4의 황금 비율에 따라 냄비에 물 4 도토리 앙금 1을 넣고 녹였다. 도토리 앙금이 물에 녹으니 연한 밀크 초콜릿색이 났다. 레인지에 불을 켜고 주걱으로 젓기 시작하니 1분쯤 지나자 냄비 바닥에 갈색 멍울이 망울망울 지기 시작했다. 1분이 더 지나니 풀을 쑬 때처럼 걸쭉해지더니 조금 더 지나니 아주 뻑뻑해졌다. 되직해진 도토리 죽을 주걱으로 계속 저으니 흐르는 물을 거스르며 힘겹게 걷는 것 같았다. 색깔은 진한 고동색이 되었다. 10분이 될 때까지 끓이면서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다 불을 끄고 들기름과 소금을 넣고 저었다. 유리그릇에 되직해진 도토리묵을 부은 다음 식히니 탱글탱글한 도토리묵이 되었다.





산에서 주울 땐 딱딱하고 동글동글했던 도토리가 방앗간에서 앙금으로 형체 없이 부서지더니 집에 와선 담아내는 그릇의 모양대로 다양한 모양의 도토리묵이 되었다. 소설반 문우들도 "다리를 잃은 불구의 아들을 등에 업고 한 달에 한 번씩 사창가를 찾는 어머니"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누구는 동그랗게, 누구는 네모나게 소설을 지었다. "40대에 은퇴해서 놀고 있는 자녀와 90대 노동자가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라는 공통된 주제로도 동그랗고 네모나고 세모나게 이야기를 탱글탱글하게 만들었다. 내가 집에서 끓인 도토리묵 모양처럼 각자가 가진 틀에 부어 다양한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주먹구구 레시피 (도토리묵 끓이기)


재료: 도토리 앙금 1컵, 물 4컵, 들기름 1큰술, 소금 약간.


1. 물 4컵에 도토리 앙금 1컵을 넣고 잘 풀어준 다음 냄비에 넣고 불을 켠다.

2. 중불에서 저어가며 10분간 끓인 다음 불을 끄고 들기름 한 큰 술과 소금을 넣고 저어준다.

3. 유리 볼에 끓인 도토리를 부어주고 차갑게 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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