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달맞이꽃 아련히 피어난 강가를 돌아 달빛 먼 길에서 오는 줄 알았다. 님은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서걱서걱 풀잎 스치는 바람 소리를 내며 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강가를 돌아오지도 먼 길에서 오지도 않았다. 아무런 인기척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와버렸다. 님과 함께 강렬하게 지낸 지 나흘이 되었다. 님을 품은 강렬함이란 몸속에서 활화산이 끓어오르듯 뜨거운 마그마가 몸을 들썩거리게 한다.
지난 목요일, 오후부터 목이 칼칼하더니 기침이 나왔다. 그동안 요리조리 잘 피해 왔는데 그님이 나에게도 찾아온 건가?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자가 진단 키트를 꺼내 검사를 했다. 하얀 면봉이 달린 얇은 막대기를 콧구멍 속으로 집어넣고 둥글게 원을 그리며 문지르니 재채기가 나왔다. 용액이 든 얇은 대롱 속으로 면봉을 열 번 정도 저은 뒤 꺼냈다. 뚜껑으로 막은 대롱을 위아래로 대 여섯 번 살살 흔들었다. 검체 추출액을 검체 점적 부위에 세 방울 떨어뜨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빨간 줄이 그어졌다. 한 줄이었다.
음성인 상태였지만 밤 새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으슬으슬 몸살기가 있으면서 추웠다. 속옷을 껴입고 긴 팔 옷으로 갈아입었다. 목이 따끔거렸다. 기관지 저 밑이 근질근질하더니 기침이 켁켁 나왔다. 가래가 끼는지 음음 거리며 짧은 소리를 자주 냈다. 가래는 아직 뱉어낼 정도는 아니고 머리는 심하게 아픈 것은 아니나 약간 띵한 느낌이었다. 목이 잠기면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청명한 바람이 불어왔다. 딸이 연락을 했는지 아들한테 전화가 왔다. 환절기라 독감일 수 있으니 지레 겁먹지 말고 병원에 가서 얼른 검사받으란다. 밖에 나가니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집에서 십분 거리에 있는 이비인후과로 걸어갔다. 신속항원 검사를 하기 위해 젊은 의사선생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역 복을 뒤집어쓰고 검사실로 들어왔다. 내가 “선생님! 꼭 우주인 같네요.”라고 했더니 모두의 안전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단다. 그러면서 “방역 복이 이제 징글징글해요.”라며 웃는다. 의사선생이 하얀 솜이 달린 얇고 기다란 막대기를 코에 넣고 쑤셨다. 비갑개 쪽까지 막대기를 넣고 후비니 캑! 소리와 함께 코끝이 찡하니 아팠다. 검체 추출액을 검체 점적 부위에 떨어뜨리니 곧바로 빨간 줄이 두 줄 선명하게 그어졌다. 엉덩이에 주사를 맞고 처방받은 약봉지를 들고 돌아왔다. 아! 나에게도 드디어 그님이 오고야 말았구나. 저 푸른 초원은 아니지만 방 한 칸에 기대어 일주일을 살아야 하다니.
양성 판정을 받은 다음날은 일 년에 한 번씩 친정 자매들과 손톱에 봉숭아 물들이기를 하며 공식적으로 외박하는 날이었는데 모든 일정이 취소됐다. 왜 하필 님은 이때 왔단 말인가. 아쉬움도 잠시 약을 먹어서 그런지 눈가에 졸음이 몰려왔다. 침대에 누웠다. 한 숨 자고 두 숨 자고 침대와 자꾸 한 몸이 되었다. 가끔씩 기침이 켁켁 나온다. 창자가 울리도록 기침을 해댔다.
잠에 취해 있는데 카톡 창이 시끄럽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고 묻는다. 기운도 없고 코도 찍찍하고 목도 칼칼하고 팔다리가 쑤시고 아픈데 견딜 만하다고 거짓부렁을 적어 올렸다. 잠에 취해 비몽사몽인데 전화가 연달아 들어온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 남편까지. 최대한 아프지 않은 목소리를 내려고 톤을 높여가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다들 염려하지 말라고.” 아내가 아프면, 엄마가 아프면, 주부가 아프면 집집마다 비상이 걸린다. 그러니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 아내도 아프면 안 된다. 주부도 아프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인가.
여기저기서 자꾸 전화가 오니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부엌으로 나와서 루꼴라 새우 죽을 끓였다. 야채실에 사다 놓은 루꼴라가 한 줌 남아 있기도 해서지만, 남편의 코로나 죽으로 루꼴라 죽이 인기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끓이는 루꼴라 죽은 아픈 나에게 내가 대접하는 죽이다. 먼저 당근, 양파, 표고버섯 서너 장을 다지기에 넣고 잘게 다졌다. 다지기가 없었다면 야채 써는 일에 시간이 많이 걸렸을 텐데 야채를 넣고 버튼을 서너 번 누르니 야채가 잘게 다져졌다. 누가 이렇게 신박한 물건을 만들어 냈는지 그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오목한 냄비에 다진 야채와 물을 적당히 붓고 코인 육수 두 알을 넣었다. 야채가 푹 무를 때까지 팔팔 끓이니 용솟음치듯 끓어오르는 육수와 함께 울긋불긋한 야채조각들이 신명 나게 춤을 추었다. 야채와 어우러진 멸치국물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다. 새우는 뻣뻣한 껍질을 까서 말캉한 속살을 넣고, 미끈거리는 오징어는 잘게 다져 넣으니 금세 목화솜처럼 하얗게 익었다. 쫀득한 찰밥 한 공기를 넣어주고 국자로 저어가며 풀어줬다. 작은 분화구를 여러 개 만들어 내며 죽이 냄비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다. 서양 시금치 루꼴라를 송송 썰어 마늘과 함께 넣고 휘휘 저어주니 루꼴라의 초록빛이 야채와 하얀 찰밥을 만나 노란색이 감도는 연두 빛으로 곱게 물든다.
쉬는 시간마다 전화를 하던 딸내미에게 루꼴라 죽을 끓이는 중이라고 했더니 아픈데 무슨 죽을 끓이느냐며 당장 그만두란다. 자기가 퇴근하는 길에 샐러드도 죽도 사 가지고 오겠다며. 말은 고맙지만 이미 다 끓여버렸는 걸 어쩌란 말인가. 아직은 이 정도는 움직일 수 있으니 괜찮다며 딸내미를 안심시키고 전화를 끊었다. 다 끓여진 루꼴라 죽을 한 술 떠서 호호 불어 입에 넣으니 새벽녘에 이슬 머금은 풀잎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찹쌀이 퍼져 걸쭉해진 죽이 혀끝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새우와 오징어가 씹히며 고소함을 더해주니 드넓은 바다의 향기가 더해졌다. 내가 나를 위해 끓인 루꼴라 새우 죽을 앞으로 서너 그릇만 더 먹고 나면 아픈 것이 다 나을 것 같았다. 죽을 소분 해서 그릇에 담아두고 여기저기 살균액을 충분히 뿌려 닦아낸 뒤 부엌을 나왔다. 이제부터 한 주 동안은 들어서지 않을 나의 부엌을.
젊은 날엔 바빠서 요리를 열심히 하지 못하던 내가 요리하는데 열심을 내게 된 것은 몸이 아프고 나서다. 잘 먹어야 건강하다는 진리를 아프고 나서야 깨달았으므로. 건강을 잃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으므로. 엄마는, 아내는, 주부는 몸이 아프고 나서야 스스로를 돌볼 겨를이 생기는 존재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가족을 위해서 내내 살아내다가 아프고 나서야 제 몸을 돌보게 되는 그런 미련함이 있는 존재가 엄마이고 아내이며 주부인 것이다. 나보다 자식을 우선적으로 돌보는 엄마들, 나보다 남편을 먼저 생각하는 아내들, 나보다 가족의 필요를 더 챙기는 주부들의 대열에 끼어서 나도 역시 그랬다.
밤 9시가 되어 줌으로 에세이 클럽이 시작되었다. 수업시간 내내 졸음이 찾아왔다. 약기운이 눈꺼풀로 한꺼번에 몰려간 것 같았다. 최대한 정신을 차리고 집중하려 했으나 몽롱한 기운에 어떻게 수업을 마쳤는지 모른다. 그저 급우들의 진지하고 차분한 눈빛과 선생님의 빠른 말솜씨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는 목소리만 기억에 남는다.
양성 판정을 받은 지 사흘 째 되는 오늘은 기침이 많이 심해졌다. 지하에서 마그마가 용솟음쳐 끓어오르듯 멈추지 않는 기침을 토해낼 때마다 허리가 끊어져라 아프고 골이 흔들린다. 하지만 다행히 심한 열과 지독한 몸살기는 없으니 이만하면 적당히 부대끼는 것이라 감사할 따름이다. 님과 함께 부대끼는 기간만큼은 가족에게 향했던 마음을 접고 나에게 집중하며 충분히 쉬고 또 대접받으며 지내야겠다. 자가 격리하고 있는 방안으로 얼큰한 육개장, 닭개장, 맑은 소고기 뭇국이 돌아가며 들어온다. 맛깔나게 맛있는 걸 보니 남편이 어디서 사다 대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지구촌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아직도 일일이 찾아가고 있는 이님은 언제나 걸음을 멈추려는지. 그의 걸음이 온전히 멈추게 되는 날 다 함께 모여 환하게 웃으며 축배를 들리라.
<루꼴라 새우 죽>
재료: 야채 다짐(당근, 양파, 표고버섯, 단 호박) 1 공기, 새우 6 마리, 오징어 1마리, 마늘 4쪽, 루콜라 한 줌, 찰밥 1 공기, 물 1.5L, 코인 육수 2알.
1. 냄비에 다진 야채와 물, 코인 육수를 넣고 야채가 무를 때까지 펄펄 끓여준다.
2. 야채가 익는 동안 새우는 껍질을 까두고 오징어는 잘게 다져둔다.
3. 끓는 야채에 오징어와 새우를 넣어준 다음, 찰밥을 넣고 국자로 풀어준다.
4. 밥알이 다 풀어졌으면 찧어둔 마늘을 넣고 송송 썰어둔 루꼴라를 넣은 다음 국자로 서너 번 휘휘 저어준 후 불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