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시누가 가까이 살아서 시누네 텃밭에 가끔 간다. 어머님을 쏙 빼닮은 시누네 밭에는 갖가지 채소들이 자라고 있다. 지난 주말에 시누네 농장에 들렸더니 텃밭에 들어가 보라고 했다. 허름한 신발로 갈아 신고 밭고랑을 타고 들어가니 배추, 무, 대파, 쪽파가 분단별로 가지런히 줄 맞춰 서 있었다. 어쩜 이렇게 실하게 컸을까. 배추는 마치 유치원에 다니는 튼튼한 사내아이의 몸집만큼이나 훌쩍 자라났다. 배추 뒤로는 흙을 높게 쌓아서 두둑하게 만든 밭이랑 위로 무가 몸통을 10센티나 내놓고 있었다. 무 몸통 위로 싱싱한 초록의 무청이 수북했다.
‘형님이 무는 두 개를 뽑으라고 했지? 실한 놈이 또 어디 있나?’ 먹잇감을 찾아 약삭빠르게 움직이는 승냥이의 눈초리로 밭이랑을 훑어보았다. 가까이 들여다봐야 보일 정도로 몸을 감추고 있던 큼지막한 무가 눈에 들어왔다. ‘요놈 실하게 생겼네.’ 다른 무 보다 크다는 이유로 막대기처럼 억센 무청의 머리채를 손아귀로 움켜잡았다. 좌우로 두 어 번 흔들면서 위로 잡아당기니 하얀 무가 불쑥 내게 달려들었다. 낚싯대를 낚아챘을 때 팔딱거리며 딸려오는 활어처럼 싱싱하기 그지없었다. 뽑은 무 두 개를 밭고랑에 눕혔다. 건강한 청년의 젊음이 흙바닥에 누워 활기차게 숨 쉬는 것 같았다. 무 뒤쪽에서 다소곳하게 서 있던 쪽파도 두어 주먹 뽑았다.
남편의 큰 누나인 형님은 도시에서 자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수확의 기쁨을 맛 보여주기 위해서 늘 신경쓰신다. 지난 주에는 무가 아직 덜 자라서 앞으로 좀 더 키워야 하니 두 개만 뽑아 가라고 하셨다. 무 생채를 담으면 맛있을 거라면서. 심고 가꾸는 과정의 수고로움을 생략하고 수확의 즐거움만을 오롯이 차지해 버리는 것이 마냥 미안하지만 나는 시누이 농장에서 가볍게 경험하는 농부의 시간이 때론 즐겁다. 이런 것을 경험해 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는 형님의 마음은 돈으로는 결코 살 수 없는 값진 선물이라 생각한다.
형님네 밭에서 뽑아온 무 두 개는 더벅머리 총각의 덥수룩한 머리숱처럼 무청의 숱이 풍성해서 단순히 무 두 개가 아니고 무 무더기 같아 보였다. 형님은 무로는 생채를 닮고 무청은 삶아서 시래깃국을 끓여 먹으면 맛있을 거라고 하셨다. 하지만 나는 싱싱한 무청을 보면서 무 백김치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붉은 고추 양념을 하지 않고 하얗게 담는 백김치 말이다. 백김치는 대부분 배추로 담는 것이 보통이지만 무청으로 백김치를 담아도 맛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무청에서는 시원한 맛이 나오기 때문에 국물을 자작하게 담아놓으면 별미일 것 같았다.
무 백김치를 담았다. 잘 익힌 무 백김치는 무청에서 나온 즙 때문에 색깔은 약간 푸르스름하면서도 국물에서 톡 쏘는 사이다처럼 시원한 맛이 났다. 무청과 함께 나박나박 썰어 넣은 하얀 무는 새색시의 속살처럼 희어서 푸른 바다에 하얀 돛단배가 여러 척 둥둥 떠 있는 것 같았다. 백김치 좋아하는 딸내미에게 두어 사발 나누어주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사위랑 금세 다 먹었다며 엄마의 무 백김치는 창의적인데도 맛은 한국의 깊은 맛이라고 했다. 보통의 열무김치 담는 방법에서 붉은 고춧가루만 넣지 않고 약간의 변화를 주었을 뿐인데 창의적인 김치라는 말을 들으니 어깨가 으쓱했다. 김치는 이렇게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어떤 양념을 하느냐에 따라 맛이 사뭇 달라진다.
왜 글을 써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글을 써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가끔 접한다. 이런 질문은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니더라도 자주 쓰든 가끔 쓰든, 길게 쓰든 짧게 쓰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질문이다. 어쩌면 또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질문일지 모른다. 왜 사느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는 질문 앞에서 적절한 이유를 찾아낸 다음에야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것 같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 것 같이 느껴졌던 순간처럼 글 쓰는 이유를 찾는 것 또한 글 쓰는 이들에겐 의미 있는 과정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왜 써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써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얻은 사람만이 의미 있는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목적을 발견한 삶만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내는 것 또한 의미 있는 것일 테니까.
뒤돌아보면 사십 대와 오십 대를 지날 때는 ‘왜’와 ‘무엇’에 대한 질문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왜 살아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가?라는 목적을 찾기 위해 허둥거렸다. 축적된 경험치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내가 선택한 길이 과연 옳은 길인가? 이렇게 나가면 제대로 가는 것일까?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육십 대에 접어드니 ‘왜’, ‘무엇’이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 앞에 서 있을 때가 많다.
인정받기 위해서, 나를 발견하기 위해서, 지난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책을 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등등의 목적을 지향하는 글쓰기는 목적이 사라지면 글을 써야 할 동력을 잃어버린다. 간혹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수험생이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입학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처럼 목적을 지향하는 글쓰기 또한 목적을 달성하고 난 이후에는 글 쓰는 방향을 잃어버리고 만다. 하지만 ‘어떻게 쓸 것인가?’ 방법론을 찾는 글쓰기는 선택에 대한 후회, 불안, 갈등을 넘어선 글쓰기라 생각한다. 글을 쓸 때마다 이미 쓰기로 선택한 나 자신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자세야말로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며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글을 쓰기 전에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면 지나간 날들의 사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에세이를 쓸 것인가, 간결하면서도 묵직한 울림을 주는 수필을 쓸 것인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허구적인 이야기로 만들 것인가, 함축적인 글로 강렬하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된다. 경수필을 쓸 것인가 중수필을 쓸 것인가, 단편소설을 쓸 것인가 장편소설을 쓸 것인가도 생각하게 된다. 열무김치를 지금까지 담아왔던 방법처럼 빨갛게 담지 않고 하얗게 담아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요리법을 따라 담지 않고 나만의 방법으로 무 백김치를 담은 것처럼 내 생각과 경험을 어떻게 버무려낼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써야 할까’를 고민하다 보면 ‘왜 글을 써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글을 써야 하는지’ 질문하면서 방황하던 마음은 땅속 깊은 곳으로 어느새 숨어버린다. ‘어떻게 써야 할까’라는 질문은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글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